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까요 - 조직신학 연구 보고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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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까요?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보내시는가 - 지옥의 실재에 관한 연구 보고서 일가 친척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런데, 이토록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둘째 사망)에 던지시는 것일까요? 모두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기뻐하며 영생을 누리면 안되는 것일까요? 아직까지 믿지 않는 친척들을 명절마다 만나면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십자가 구원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두려운 지옥 심판이 과연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고심하게 되지요. 이러한 사실은 현대 교회가 설교나 교육을 통해 가르치기를 꺼려하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을 희화화하거나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며 심판을 부정하지만, 지옥을 단지 가벼운 위협으로만 치부해 버리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대속의 가치가 흔들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 마태복음 25장 46절과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은 최종 심판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원어상 '영벌'과 '영생'을 수식하는 단어는 동일한 영원성을 지니며, 둘째 사망인 불못은 피조 세계에서 악을 완전히 정화하는 거룩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억지로 괴롭히는 가학적 장소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옥이라는 곳은 평생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주권을 고집했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이 지옥은 이 땅에서 불신자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부재'의 장소입니다. 지옥에 관한 전통적...

창세 전에 시작된 사랑, 세상을 향해 달리는 발걸음 - 예정론에 관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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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전에 시작된 사랑, 세상을 향해 달리는 발걸음 창세 전에 시작된 사랑, 세상을 향해 달리는 발걸음 - 예정론은 어떻게 전도의 두려움을 걷어내고 거룩한 확신을 주는가 우리는 가족 구원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때가 있다. 가족과 이웃의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할 때 성도의 마음에는 깊은 무기력과 두려움이 찾아오곤 합니다. "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구원받을 사람을 이미 정하셨다면, 내가 굳이 눈물 쏟아 전도할 필요가 있을까? " 하는 의문이나 " 내가 제대로 전하지 못해 저 영혼이 멸망하면 어쩌나 "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과 에베소서 1장에서 선포한 예정론은 성도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운명론의 족쇄가 아니었습니다. 서슬 퍼런 박해와 영적 혼란 속에서 흔들리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구원의 닻을 내려주려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였습니다.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핵심 원어의 의미들 핵심 헬라어 원어를 살피면 예정의 본질이 냉정하고 기계적인 조종이 아닌 깊은 언약적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사용한 '프로오리조(προορίζω, 미리 정하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파멸 대신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최종 지평선을 그어두셨음을 의미합니다. '프로기노스코(προγινώσκω, 미리 아심)' 역시 단순한 사전 지식을 넘어 성도를 마음에 품으신 언약적 사랑의 결속을 ...

44도의 한복판에서, 나는 9월을 잊었다 - 요한계시록 20장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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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도의 한복판에서, 나는 9월을 잊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오후 1시. 사해 남단, 마사다 근처의 기온은 44도였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 근처의 타바 국경에, 성지순례팀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이 정도의 기온이라면, 버스 밖을 나와 광야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그늘에 들어가도 별 소용 없는 더위였다고 기억한다. 올해 한국의 8월도 40도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지금 9월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선선해졌다. 새벽 공기는 벌써부터 차갑다. 우리는 그걸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알고 있다. 50년 넘은 인생이니, 50번 이상은 경험했고 체득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8월의 불볕 더위 한복판에 서 있으면 9월을 잊어 버린다. 참으로 고약한 건망증이다. 곧 선선해질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더위에 지치고, 짜증 내고, 불평한다. 머리로 아는 계절의 흐름과 몸으로 견디는 계절은 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도 그런 것 같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오늘이 너무 뜨거우면, 그 끝을 잊어버리고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신앙의 여정에는 불볕더위 같은 때가 있다. 치열하고 뜨겁고 피곤하다.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요한계시록 20장은 바로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신앙의 여정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악한 자는 심판을 받아 불못에 던져지고, 끝까지 주를 붙잡은 성도들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리고 주와 함께 영생의 복을 누린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마지막 모습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절-15절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성도가 결코 떨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 신약신학 연구 - 요한계시록 22장 19절의 '생명나무'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요한이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너희들이 견디는 이 시간이 마지막은 아니라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 그들은 왜 심판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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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 그들은 왜 심판받았는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의 관계에 관한 연구 보고서 1. 본문이 던지는 질문: 이들은 누구인가 창세기 6장 1–4절을 읽으면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네피림과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진다. 천상적 존재라는 해석, 셋의 경건한 후손이라는 해석, 신적 권위를 내세운 고대의 군주나 지배층이라는 해석이 오랫동안 맞서 왔다. 일반적으로는 셋 후손론과 군주론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곤 한다. 곧, 하나님을 섬길 책임이나 높은 지위를 지닌 사람들이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여자를 취하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창조의 경계를 허문 사건으로 읽는다. 네피림에 관한 신비한 이야기에만 시선이 머물면 본문이 고발하는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놓치기 쉽다. 2. 하나님의 아들들과 네피림의 관계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여기에는 육체적 욕망과 일부다처, 힘을 이용한 탈취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그 무너진 질서 속에서 네피림과 고대의 용사들, 곧 세상이 이름난 인물로 떠받들던 자들이 등장한다. 두 집단의 생물학적 관계를 세밀하게 밝히는 데 본문의 무게가 놓여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네피림은 경계를 넘은 욕망과 권력이 빚어낸 폭력적 시대를 보여 주며, 세상이 칭송한 힘이 하나님 앞에서는 부패의 증거가 되었다. 3. 육체가 된 인간과 다가온 심판 하나님은 인간을 두고 “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라고 선언하시며 그 날을 120년으로 정하신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정욕과 자기 과시에 붙잡힌 ‘바사르’,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로 드러난 것이다. 120년은 홍수까지 허락된 유예 기간으로도, 인간 수명의 한계로도 읽혀 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심판의 긴박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담은 말씀으로 이해하곤 한다. 힘센 용사도, 이름을 떨친 지배자도 이 선언을 비켜 가지 못했다. 마침내 이...

하나님은 왜 연합의 자리에 복을 주시는가 - 시편 133편을 더 깊이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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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연합의 자리에 복을 주시는가 시편 133편 1절-3절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연합의 시편을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신학적 목회적 연구보고서 시편 133편 1절-3절, 하나님은 왜 연합할 때 복을 주시는가 -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연합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베푸시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정말 선하고 아름답다!" 딸과 아들이 사이좋게 어울려 조곤조곤 대화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보는 아빠된 내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왠지 마음도 흐뭇해지고 행복함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요. 시편 133편 역시 사이좋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선하고 아름답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며 습관이 다르지만,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품어가며 함께 어울릴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표현합니다. 더욱이,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것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을까요? 아름답고 선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다양함이 하나가 되는 연합 본문을 해석하는 여러 신앙 전통은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들의 공통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연합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다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겸손과 책임감을 가지고 평화를 이루는 언약 공동체를 강조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회의 연합을 그리스도에게서 흘러오는 성령의 은혜로 이해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연합은 사람의 친밀감이나 뛰어난 조직 운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서로 생각과 모습이 달라도 같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생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가 삶으로 연합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 어려움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들 말합니다. 세대 차이와 개인주의, 경쟁과 생각의 대립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

애써도 늘 제자리인 내 신앙, 왜 늘 무너질까요? - 빌립보서 2장 12절을 통하여 살펴 보는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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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도 늘 제자리인 내 신앙, 왜 늘 무너질까요? 1. 내 열심으로 버티면 지킬 뿐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예배 후, 한 집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집사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 지 50년이 넘는데, 왜 내 삶은 행복하지 못하고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죄 앞에서 금방 무너질까요? 이 질문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나가 한번쯤은 고민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질문을 무수히 많이 하면서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믿음은 자라지 못하는 것 같고, 왜 여전히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빌립보서 2장 12절의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는 말씀을 마주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의지와 결심으로 어떻게든 거룩하게 살아 보려고 몸부림칠수록 남는 것은 영적 피곤함과 자책감뿐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성화는 결코 내 악착같은 노력으로 구원의 자격을 쟁취해 내는 외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2. 내 안에 소원과 능력을 부으시는 은혜 사도 바울은 12절의 명령 바로 뒤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복음의 자리를 활짝 열어두었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높은 기준만 제시하시고 잘 지키는지 못 지키는지를 멀리서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독생자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께서 바로 지금, 넘어지기 쉬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닮아가고픈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시고 계십니다. 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능력'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삶", 즉 "성화"는 지키지도 못하는 나의 연약한 결심을 쥐어짜서...

요한계시록 19장 1절-21절, 신부는 어떻게 거룩함을 지켜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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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장 1절-21절, 신부는 어떻게 거룩함을 지켜야만 하는가 1. 은혜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일상의 자발적 순종 신부가 거룩함을 지키는 출발점은 십자가에서 값없이 내어주신 은혜를 온전히 깨닫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입혀주신 세마포는 우리 스스로 쟁취한 공로가 결코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인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 옷을 흠 없이 유지하는 방법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고 완벽한 행위를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신부로 삼아주신 신랑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매일 주어지는 일상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옳은 행실'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교리적인 지식으로 단단히 다질 때, 우리는 조급함을 버리고 한 걸음씩 차분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바벨론의 방식을 거절하는 단호한 영적 정절 세상의 화려한 유혹 속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면 세속의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영적 정절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바벨론의 물질주의가 결국 철저히 무너진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뒤처질까 불안해하며 헛된 세상의 속도를 허겁지겁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 문화를 단호히 거절하고, 매일 성경을 펴서 진리의 말씀을 꼼꼼히 묵상하고 기록하며 그 기준대로 곧게 걷는 삶이 곧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단장입니다. 3. 확고한 승리의 교리와 기쁨으로 채우는 기다림 거룩함은 두려움에 쫓겨 방어적으로 숨어 지내는 태도가 아니라, 신랑을 맞이할 잔치를 기쁨으로 예비하는 역동적인 기다림을 뜻합니다. 1세기 유대인의 혼인 풍습에서 신부가 매일 등불을 닦으며 신랑을 기다렸듯, 이 땅의 교회가 감당할 몫은 오늘 하루 치의 영적 생명력을 성실하게 채우는 일입니다. 혼자 외롭게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