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r

6/recent/ticker-posts

주의 말씀을 즐거워할 때, 시편 1편 1절-6절 - 묵상과 설교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기준(canon)이 되기에 말씀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할 때, 나를 찾고 진정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묵상하고 설교로 정리하였습니다.


묵상_설교_큐티_시편1편



주의 말씀을 즐거워 할 때



시편 1편 1절-6절, 개역개정 성경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아멘!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


우리 시대가 맞이한 가장 큰 문제점은,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정체성의 혼란의 문제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은 그리스 시대의 배우들이 얼굴에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가면을 쓰면, 배우의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가면이 나타내는 인물이 됩니다. 장군의 가면이 쓰면, 배우가 장군이 됩니다. 임금의 가면을 쓰면, 배우가 즉시 임금으로 변화합니다. 이처럼 본래의 모습을 가리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 혹은 성격을 '페르소나'라고 부른다고 심리학자인 융은 정의를 내렸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는 '페르소나'가 너무나도 많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를 "멀티 페르소나"(Multi Persona)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겉이 다르고 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적절하게 가면을 바꿔 쓰는 것은 생존의 전략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를 대할 때 쓰는 가면과 퇴근 후에 나의 가면은 다릅니다. 집에서 편안하게 말하고 행동하듯이 직장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면 아마도 직장에서 해고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누구나가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쓰는 가면들이 너무나도 많다보니, 때로는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며 정체성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내 성격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참 모습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집에서의 나의 모습과 성격이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다른 모습이 또한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혼란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알지 못해서 혼란스럽습니다.



기준점이 되는 주의 말씀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상황에 따라는 악한 일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악한 일로 여겨 왔던 일이 때로는 선한 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을 규정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기준이 모호하기에 혼란스럽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막아 주고 정리를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이 옳은 일이며 무엇이 그릇된 일인가를 분명하게 정리해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서 통행의 순서를 부여하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신호등"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삶은, 눈치껏 지나가다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신호등 없는 사거리에 정확한 신호등을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가까이 할 때, 나의 생각과 가치와 인생의 기준이 분명하게 정리가 됩니다.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분명하게 알게 되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은 죄악이며 순종하는 일이 선한 것임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시편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인생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니, 자연스럽에 우리 인생은 복 있는 인생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단순히 재물을 많이 가지거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복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많이 가져도 슬프고 괴로워 가진 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마음이 기쁘고 늘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가까이 할 때, 복 있는 인생으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 있는 인생이란, 물질을 가까이 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인생"입니다. 시편 73편의 시인은 복된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시편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인생의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하고 마음을 쉴 수가 있습니다. 안심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이 있으면, 물질이 많고 적음은 두번째가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복 있는 인생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그리고 "주의 말씀을 즐거워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구약 성경의 야곱이라는 인물은, 여러 가면을 쓴 인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멀티 페르소나의 인물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에 드는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배고파 하는 형 에서의 앞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팥죽과 장자권을 바꾸려고 시도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또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형을 대신하여 받을 때는 모든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기도 하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때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이었고, 라반의 집에서는 살아 남기 위하여 비굴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도망 나올 때는 겁쟁이였고, 가나안 땅에서 다시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기보다는 자기 목숨을 가장 우선시하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았던 야곱은, 많은 재물과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된 만족과 안식이 없었기에 항상 불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패배하고 엎드렸을 때, 그의 인생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했고, 그의 모습이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러 주신 주의 말씀을 즐거워할 때 그의 인생이 변하고 진정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 할 때


오늘 본문은 주의 말씀을 즐거워 할 때 의인이 누리는 진정한 복과 말씀과 상관 없는 삶을 사는 악인의 혼란스러운 삶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편 1:3-4,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한 의인은, 메마른 중동 지방에서도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풍성한 열매를 시시때때로 맺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악인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의 안정감,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 있는 삶,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을 깨닫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가까이 할 때만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참고할 글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