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으로 판단할 때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할까요?

이미지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으로 판단할 때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할까요? - 고린도후서 5장 11-21절을 묵상하며 Q: Question (질문하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속에 묘한 갈등이 찾아옵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벅찼던 첫 마음 뒤편으로, 여전히 나 자신만을 챙기려는 옛 습관과 세상의 차가운 잣대가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21절을 천천히 묵상하며, 초신자의 고단한 마음에 길잡이가 되어 줄 네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1.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할 때,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할까요? (11–13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 할수록 주변에서는 ‘유난스럽다’거나 ‘적당히 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미쳤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차가운 시선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2. 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내 뜻대로만 살 수 없게 되는 걸까요? (14–15절) 내 시간, 내 재정, 내 안락함을 먼저 챙기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큽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억지스러운 의무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요? 3.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데, 나는 왜 여전히 부족하고 그대로인 것 같을까요? (16–17절) 세례를 받고 1년이 흘렀지만 삶의 문제와 연약함은 여전합니다. 바울이 선언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다는 뜻일까요? 4. 나처럼 작은 자가 어떻게 세상 속에서 거룩한 ‘화목의 사신’이 될 수 있을까요? (18–21절) 가정이나 일터에서 여전히 다투고 토라지는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평화를 전하는 대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A: Answer (답변하기) 1. 내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평안을 얻습니다 (11–13절) 바울의 대적자들은 화려한 추천서와 말솜씨 같은 겉모습을 자랑했습니다. 반면 낡은 옷을 입고 고난을 겪는 바울을 보며 ‘정신이...

하나님은 왜 낡아가는 우리 육체 한 가운데 성령의 보증을 주셨는가?

이미지
하나님은 왜 낡아가는 우리 육체 한 가운데 성령의 보증을 주셨는가? - 고린도후서 5장 1-10절을 묵상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될 때도 있습니다. 또, 세월의 흐름 속에 문득 거울 속의 늙어가는 자신이나 부모님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며 마음이 덜컥 내려앉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불안 앞에서 고린도후서 5장 1절부터 10절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낡아가는 육체에 대한 슬픔 대신, '보이지 않는 진짜를 보는 눈'이라는 관점으로 본문을 QADI 방식으로 묵상하였습니다. Q: Question (질문하기) 본문 7절에서 바울은 왜 나이 듦과 장막을 이야기하다가 불쑥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라는 말을 꺼냈을까요? 5절에서 하나님은 왜 낡아가는 우리 육체 한가운데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약속하셨을까요? 몸이 약해지고 시력이 흐려지는 신체적인 변화와, '믿음으로 걷는 삶' 사이에는 어떤 숨은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A: Answer (답변하기) 눈에 보이는 포장지와 알맹이의 차이입니다. 다섯 살 아이에게 아주 좋은 장난감을 선물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이는 처음엔 번쩍이는 포장지에 홀립니다. 하지만 곧 포장지를 북북 찢어 던집니다. 상자 속에 든 진짜 선물을 꺼내기 위해서입니다. 포장지가 찢어진다고 우는 아이는 없습니다. 알맹이가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영혼을 담아둔 포장지와 같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포장지는 당연히 구겨집니다. 색도 바랩니다. 바울이 말한 장막이 바로 이 포장지입니다. 나이가 들면 눈도 침침해집니다. 귀도 전처럼 밝지 않습니다. 세상의 화려한 풍경이 흐릿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때 진짜 시력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 믿음의 눈이 맑아집니다. 손에 쥔 것들이 하나둘 빠져나갈 때 영원한 ...

사도 바울은 왜 당장 고린도교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까

이미지
사도 바울은 왜 당장 고린도교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까 - 고린도후서 1장 23절-2장 17절 묵상하기 -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처음엔 보이지 않던 서운함이나 사람 사이의 삐걱거림이 문득 마음에 걸리곤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모였는데 상처를 주고받을 때면 '내가 잘못하고 있나' 덜컥 겁이 나기도 하지요. 바울 역시 아끼던 고린도 교인들과 가슴 시린 오해를 겪었습니다. 그 먹먹한 마음을 안고 한 걸음씩 본문을 짚어봅니다. Q: Question (질문하기) 1. 바울은 왜 당장 달려가지 않고 발걸음을 멈췄을까요? (1:23-2:4) 화가 났을 때 바로 찾아가 따지면 끝장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일정을 미루고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 속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2. 왜 교회에 아픔을 준 사람을 그만 꾸짖고 어서 안아주라고 할까요? 잘못한 사람에게 죗값을 끝까지 묻지 않고, 적당한 징계 뒤에 도리어 위로하며 사랑을 보여주라는 말이 얼핏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3.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던 바울이 어떻게 '항상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2:12-17) 동역자 디도를 만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마게도냐로 넘어가던 사람이, 바로 다음 숨에 하나님을 향한 벅찬 찬송을 터뜨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A: Answer (답변하기) 1. 사랑하기 때문에 밟은 '사랑의 멈춤'이었습니다. 다섯 살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온 집안을 어지럽혔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부모가 그 자리에서 바로 소리를 지르면 아이는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습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다른 방으로 물러섭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정말 아이를 살리는 말을 고르기 위해서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굴복시키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방문을 늦추고 눈물로 글을 썼습니다. 2. 벌을 주는 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살려내는 데 있습니다. ...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적셔 주십니까 - 시편 65편 9-13절 묵상

이미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적셔 주십니까 - 시편 65편 9-13절 묵상 우리는 지치고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컵을 건네주는 다정한 이웃을 좋아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1년 남짓 지나면, 처음의 설렘 뒤로 '내가 지금 잘 믿고 있는 걸까?' 하는 막막함과 삶의 고단함이 함께 찾아오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짝 말라버린 땅을 농부처럼 직접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천천히 본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 질문을 던지고, 말씀을 가만히 마음에 담아봅니다. Q (Question, 질문하기): 마른 밭 앞에서 던지는 물음 "하나님은 왜 곡식을 주시기 전에 굳이 땅을 먼저 손보실까?" (9-10절) 곡식이나 열매를 바로 안겨주시면 편할 텐데, 왜 밭고랑에 물을 대고 흙을 부드럽게 고르는 수고를 먼저 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왜 ‘주의 길’에 기름방울이 떨어진다고 표현했을까?" (11절) 기름방울은 풍요와 생명의 진액입니다.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자리마다 어째서 이런 기름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일까요? "사람이 돌보지 않는 거친 들판과 골짜기까지 왜 양 떼와 곡식으로 덮으실까?" (12-13절) 화려한 성읍이나 왕궁이 아니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외딴 골짜기까지 기쁨의 노래로 채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A (Answer, 답변하기): 본문이 들려주는 이야기 1. 하나님은 열매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밭을 가꾸십니다. 본문의 9절을 보면 하나님은 "땅을 예비하신 후에 곡식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10절의 "부드럽게 하시고"(무그, מוּג)라는 말은 단단하게 뭉친 흙덩이를 녹여서 풀어헤친다는 뜻입니다. 딱딱한 흙에는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려도 싹이 트지 못합니다. 화분에 바싹 마른 흙이 있으면 물부터 천천히 주어 흙을 보슬보슬하게 풀어주어야 하듯,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상처와 긴장을 은혜의 단비로 먼저 녹여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해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이미지
사도 바울은 오해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Q: Question (질문하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지나면, 모든 것이 분명하고 평안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오해나 관계의 갈등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보려 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긋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장 12–22절을 천천히 읽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봅니다. 바울처럼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까요? 바울은 좋은 마음으로 방문 일정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왜 억울한 일과 오해는 여전히 찾아올까요? 사람들의 말과 평판 때문에 휘청거릴 때, 신자는 어디에 발을 딛고 서야 할까요? 바울은 비난에 맞서 변명하기보다 "하나님은 미쁘시다"라는 고백을 먼저 꺼냅니다.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약속이 "예(Yes)"가 된다는 것은 초신자인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니오(No)"라는 거절과 실패를 자주 만납니다. 이런 연약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예"는 어떤 위로가 될까요? '도장(인)'을 찍으시고 '성령의 보증'을 주셨다는 말씀은 흔들리는 내 마음에 어떤 든든함을 선물할까요? 내 믿음이 작고 연약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지키고 계실까요? A: Answer (답변하기) 1. 사람의 마음은 날씨처럼 자주 변하지만, 바울은 양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기로 약속했다가, 비가 쏟아져서 나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는 일부러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상황 때문에 못 나간 것뿐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너는 거짓말쟁이야!"라며 토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의 상황이 바로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11절, 하나님은 왜 고난을 미리 없애주지 않으실까요

이미지
하나님은 왜 고난을 미리 없애주지 않으실까요? Question (질문하기) 고린도후서는 다정한 인사말 직후부터 곧바로 '고난'과 '위로'라는 단어를 쏟아냅니다. 본문을 천천히 읽으며 몇 가지 물음이 마음에 남습니다. 1. 하나님은 왜 고난을 미리 없애주지 않으실까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난을 면제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환난을 피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 한가운데서 주어지는 '위로'를 말씀하실까요? 2. 바울의 고난과 성도들의 위로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이 고린도 교회의 위로와 구원이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어떻게 나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3. 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한계로 몰아넣으셨을까요? 바울은 아시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을 겪었습니다. 굳이 벼랑 끝까지 내몰려야 했던 영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4. 멀리서 드리는 기도가 어떻게 사람을 살려낼까요?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로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가 어떻게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 올리는 실제적인 힘이 될까요? Answer (답변하기) 1. 위로는 아픔을 통과할 때 비로소 배웁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넘어집니다. 부모는 넘어짐 자체를 마법처럼 없애주지 않습니다. 대신 넘어진 아이에게 달려갑니다.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립니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줍니다. 하나님의 위로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없는 유리 상자에 가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풍파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대신 그 길목마다 함께 걸으십니다. 그 품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기를 배웁니다. 2. 상처를 겪어본 사람만이 상처 입은 이를 품습니다. 넘어져 무릎을 다쳐본 아이는 압니다. 피가 날 때 얼마나 쓰라린지 압니다. 친구가 넘어져 울 때 반창고를 건넬 수 있습니다. 바울의 아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겪은 극심한 고통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고통...

시편 16편 10절의 '스올'과 '거룩한 자의 멸망'은 왜 예수님의 부활 예언으로 해석되나요?

이미지
시편 16편 10절의 '스올'과 '거룩한 자의 멸망'은 왜 예수님의 부활 예언으로 해석되나요? 성경을 읽다 보면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구절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보석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이 바로 그렇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시구를 찬찬히 읊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시를 지은 다윗 역시 생을 마감했고 무덤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피하지 못한 다윗의 입에서 나온 이 고백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강력한 선언으로 바뀝니다. 왜 이 문제가 중요한가? 성경이 하나의 거대한 약속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가 부른 소박한 노래가 수백 년 뒤 골고다 언덕과 빈 무덤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어느 날 갑자기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해 품으신 구원의 계획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는지 깨달을 때, 우리의 흔들리는 일상도 말씀 위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스올'은 구약 성도들이 생각했던 죽은 자들의 지하 처소를 가리킵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생명과의 단절, 차가운 흙 속 무덤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입니다. '멸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하트'는 구덩이라는 뜻과 함께 육체가 썩어 흙먼지로 바스러지는 '부패'를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그 차가운 무덤에 방치하지 않으시고, 거룩한 자의 몸이 썩어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담아 찬양했습니다. 왜 발생하는가? 다윗은 뛰어난 왕이었지만 결국 한 명의 유한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36절에서 이 사실을 명쾌하게 짚어냅니다. 다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