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연합의 자리에 복을 주시는가 - 시편 133편을 더 깊이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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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연합의 자리에 복을 주시는가 시편 133편 1절-3절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연합의 시편을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신학적 목회적 연구보고서 시편 133편 1절-3절, 하나님은 왜 연합할 때 복을 주시는가 -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연합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베푸시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정말 선하고 아름답다!" 딸과 아들이 사이좋게 어울려 조곤조곤 대화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보는 아빠된 내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왠지 마음도 흐뭇해지고 행복함을 느낄 수 밖에 없겠지요. 시편 133편 역시 사이좋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선하고 아름답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며 습관이 다르지만,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품어가며 함께 어울릴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표현합니다. 더욱이,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것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을까요? 아름답고 선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다양함이 하나가 되는 연합 본문을 해석하는 여러 신앙 전통은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들의 공통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연합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다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겸손과 책임감을 가지고 평화를 이루는 언약 공동체를 강조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회의 연합을 그리스도에게서 흘러오는 성령의 은혜로 이해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연합은 사람의 친밀감이나 뛰어난 조직 운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서로 생각과 모습이 달라도 같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생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가 삶으로 연합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 어려움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들 말합니다. 세대 차이와 개인주의, 경쟁과 생각의 대립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

애써도 늘 제자리인 내 신앙, 왜 늘 무너질까요? - 빌립보서 2장 12절을 통하여 살펴 보는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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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도 늘 제자리인 내 신앙, 왜 늘 무너질까요? 1. 내 열심으로 버티면 지킬 뿐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예배 후, 한 집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집사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 지 50년이 넘는데, 왜 내 삶은 행복하지 못하고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죄 앞에서 금방 무너질까요? 이 질문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나가 한번쯤은 고민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질문을 무수히 많이 하면서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믿음은 자라지 못하는 것 같고, 왜 여전히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빌립보서 2장 12절의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는 말씀을 마주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의지와 결심으로 어떻게든 거룩하게 살아 보려고 몸부림칠수록 남는 것은 영적 피곤함과 자책감뿐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성화는 결코 내 악착같은 노력으로 구원의 자격을 쟁취해 내는 외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2. 내 안에 소원과 능력을 부으시는 은혜 사도 바울은 12절의 명령 바로 뒤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복음의 자리를 활짝 열어두었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높은 기준만 제시하시고 잘 지키는지 못 지키는지를 멀리서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독생자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께서 바로 지금, 넘어지기 쉬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닮아가고픈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시고 계십니다. 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능력'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삶", 즉 "성화"는 지키지도 못하는 나의 연약한 결심을 쥐어짜서...

요한계시록 19장 1절-21절, 신부는 어떻게 거룩함을 지켜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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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장 1절-21절, 신부는 어떻게 거룩함을 지켜야만 하는가 1. 은혜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일상의 자발적 순종 신부가 거룩함을 지키는 출발점은 십자가에서 값없이 내어주신 은혜를 온전히 깨닫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입혀주신 세마포는 우리 스스로 쟁취한 공로가 결코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인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 옷을 흠 없이 유지하는 방법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고 완벽한 행위를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신부로 삼아주신 신랑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매일 주어지는 일상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옳은 행실'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교리적인 지식으로 단단히 다질 때, 우리는 조급함을 버리고 한 걸음씩 차분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바벨론의 방식을 거절하는 단호한 영적 정절 세상의 화려한 유혹 속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면 세속의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영적 정절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바벨론의 물질주의가 결국 철저히 무너진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뒤처질까 불안해하며 헛된 세상의 속도를 허겁지겁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 문화를 단호히 거절하고, 매일 성경을 펴서 진리의 말씀을 꼼꼼히 묵상하고 기록하며 그 기준대로 곧게 걷는 삶이 곧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단장입니다. 3. 확고한 승리의 교리와 기쁨으로 채우는 기다림 거룩함은 두려움에 쫓겨 방어적으로 숨어 지내는 태도가 아니라, 신랑을 맞이할 잔치를 기쁨으로 예비하는 역동적인 기다림을 뜻합니다. 1세기 유대인의 혼인 풍습에서 신부가 매일 등불을 닦으며 신랑을 기다렸듯, 이 땅의 교회가 감당할 몫은 오늘 하루 치의 영적 생명력을 성실하게 채우는 일입니다. 혼자 외롭게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가 서...

요한복음 8장 1절-11절, 예수님은 왜 긴박한 상황에서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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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1절-11절, 예수님은 왜 긴박한 상황에서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셨는가 1. 조급한 잣대를 거두고 천천히 멈추어 서는 거룩한 여백 세상은 늘 누군가의 허물을 지적하고 정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만, 요한복음 8장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살기등등한 군중 앞에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모세 율법을 무기로 삼아 여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예수님마저 덫에 빠뜨리려 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고요히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시며 분노를 가라앉힐 '침묵의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주께서 보여 주신 거룩한 멈춤을 통하여, 우리는 타인의 허물을 찌르기 바쁜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 앞의 내 연약함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이 글을 쓰신 것은,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주님의 뜻을 천천히 묻게 하는 은혜의 출발점이 됩니다. 2. 율법의 함정을 허무시는 긍휼의 지혜 주님께서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훈계로 넘길 내용이 아닙니다. 거짓 증인이 첫 돌을 던질 경우 그 사형의 형벌을 본인이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구약 신명기의 율법을 관통하는 정교하고도 예리한 반전의 말씀이었습니다. 가장 율법적인 공격을 가장 지혜로운 방식으로 무력화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흙먼지 날리던 성전 뜰에는 정죄하던 자들이 다 떠난 채 긍휼 그 자체이신 주님과 비참한 여인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깨어지기 쉬운 돌판으로 정죄하는 대신에 부서지기 쉬운 여인의 삶 위에 새 언약을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새겨 주셨습니다. 차가운 논리보다 영혼을 품어 안는 따뜻한 예수님의 사랑이 언제나 더 큰 능력임을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3. 절망을 넘어 찬란한 회복으로 이끄시는 십자가 사랑 군중이 모두 떠난 후 주님은 홀로 남은 여인에게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

오순절은 갑자기 오지 않았다: 구약성경과 성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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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성령, 그리고 오래된 약속의 성취 나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과 함께 등장하는 하나님으로 기억이 된다. 우리는 마가 다락방에 임한 불같은 성령,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분명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의 큰 흐름 속에서 보면, 오순절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준비해 오신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다. 우리는 구약의 처음부터 성령의 이야기를 볼수 있으며, 오순절은 그 이야기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창조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 구약의 첫 장면부터 성령은 이미 일하고 계셨다. 성령은 혼돈과 공허 위를 운행하시며 생명을 창조하고 질서를 세우셨다. 구약의 이야기 속에서 성령의 사역은 특정한 종교 행사나 영적 체험에만 머물지 않았다. 출애굽기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임하신 성령은 성막을 짓는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주셨다. 이같은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과 노동, 창의성과 전문성까지도 거룩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늘도 성령은 예배 시간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연구실에서,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누군가를 섬기는 평범한 손길 가운데서도 성령은 일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생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서 감당할 수 있다. 독점하지 않고 나누게 하시는 성령 민수기 11장에는, 너무 일이 많아서 번아웃의 단계까지 간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백성들의 모든 짐을 혼자 떠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70인의 장로를 세워 주셨고, 모세에게 임했던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셨다. 특별히 엘닷과 메닷은 회막이 아닌 진영에 머물러 있었지만 동일하게 성령을 받았다. 그들의 모습을 본 여호수아는 질서를 염려했지만, 모세의 반응은 놀랍다.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영에 충만했던 모세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성도들이 왜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욥기 42장을 중심으로 본 고난과 하나님의 자기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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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왜 성도는 고난의 이유를 묻는가 병상에 누워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환우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사고로 자식을 잃은 사람, 사업이 실패하며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된 사업가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첫째 아이가 호르몬 문제로 인해 부산의 고신의료원에 매달마다 가서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만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변의 분들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믿으세요"라는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분들의 위로의 말씀들이 귀에는 들리나 마음에까지 닿지는 않았습니다. 딸로 인하여 겪는 나의 아픔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경험할 때 본능적으로 원인과 의미를 찾기 마련입니다. "내가 왜?" 라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성도들 역시 고난과 실패와 역경 속에서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고난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기보다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의 원인을 알아서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알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욥기 42장을 중심으로 성도의 고난을 해석하는 성경적 관점을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II. 고난은 반드시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인가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욥을 찾아 왔던 욥의 친구들이 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을 강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단순한 공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고난을 한층 더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이었음에도 일반 사람들이 경험하기 힘든 극심한 고난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고난을 개인의 ...

[조직신학] 드레스 디아스(DT) ③ 한국 교단이 본 드레스 디아스 평가와 참여 논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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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들은 드레스 디아스(Tres Dias)에 대해 "평신도 각성과 영성 회복에는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보면서도, 신학적인 배경과 운영 방식의 문제로 인해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경계하거나 참여를 제지해야 한다"는 다소 엄격하고 보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주요 교단들의 공식 입장과 구체적인 평가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요 교단별 공식 입장 한국 교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형 교단들은 정기 총회를 통해 드레스 디아스에 대한 명확한 결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특히, 장로회의 입장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 교단 내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의 연구 등을 통해 드레스 디아스의 긍정적 측면(단기 영성 회복)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부작용이 크다고 판단하여 "엄히 경계하여 참여를 제지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합동 교단 역시 드레스 디아스의 카톨릭적 요소와 초교파 운동이 가진 위험성을 지적하며 "참가 금지" 및 "엄격한 경계"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타 보수 교단 (고신, 합신 등) : 개혁주의 교회론과 성경관에 위배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요소와 비공개 운영 방식을 이유로 성도들의 참여를 강하게 만류하거나 규제하는 편입니다. 2. 교단들이 지적하는 주요 우려 사항 (신학적·교회론적 관점) 교단들이 드레스 디아스를 '경계'하는 데에는 구체적인 신학적 이유들이 있습니다. ① 로마 가톨릭 색채와 용어의 문제 드레스 디아스는 가톨릭의 '쿠르시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니, 개신교식으로 변형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톨릭적 요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특히 과정 중에 사용하는 일부 용어(예: 사도적 시간, 사도적 명령, 사도적 사명 등)가 기성 개신교의 신학적 정서와 맞지 않으며, 성경적 제자 도리보다 교황 중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