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수수께끼: 요한계시록 11장 3절의 "두 증인"의 정체에 대한 신학적 탐구
요한계시록 11장의 최대 난제, '두 증인'의 정체를 신학적으로 탐구합니다. 이들은 엘리야와 모세일까요, 아니면 교회의 상징일까요? 초기 교부들의 해석부터 스가랴서의 구약 배경, 그리고 교회를 상징한다는 깊이 있는 분석까지, 종말론적 증인의 사명을 조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수수께끼: 요한계시록 11장 3절의 "두 증인"의 정체에 대한 신학적 탐구
참고할 글
서론: 묵시 문학의 심장부에 선 두 예언자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 가장 신비롭고 해석이 분분한 책으로, 그중에서도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학자와 성도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온 난제 중 하나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박해와 순교,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며 요한계시록 전체의 서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두 증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들은 역사 속 특정 인물일까요, 아니면 상징적 존재일까요? 본고는 이 오래된 신학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초기 교부들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고, 이후 구약성경의 예언적 배경과 신약의 상징적 의미를 종합하여 두 증인의 다층적 정체성을 심도 있게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본론 1: 교부들의 해석 - 다시 돌아올 엘리야와 에녹
초대교회 교부들은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을 대부분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 때에 다시 돌아올 구체적인 인물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배경에는 구약성경의 독특한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지배적이었던 견해는 두 증인이 에녹과 엘리야라는 해석입니다. 이레니우스(Irenaeus), 터툴리안(Tertullian), 히폴리투스(Hippolytus)와 같은 저명한 교부들이 이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이들이 에녹과 엘리야를 지목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성경에서 이 두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유이(唯一)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창 5:24, 왕하 2:11). 교부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예언하고, 순교의 잔을 채우기 위해 다시 땅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인류의 보편적 운명인 죽음을 마지막 사역의 정점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신학적 논리였습니다. 특히 말라기 4장 5절의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예언은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강력한 성경적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또 다른 유력한 후보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 해석은 두 증인이 행하는 기적에 주목합니다. 이들은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고(왕상 17:1, 엘리야의 기적),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능을 가졌습니다(출 7:17, 모세의 기적). 모세가 '율법'을, 엘리야가 '선지자'를 대표하는 구약의 양대 산맥이라는 점,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마 17:3)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이 해석을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율법과 예언으로 대표되는 구약 전체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초기 교부들은 두 증인을 종말론적 드라마의 주역으로 등장할 역사적 인물로 이해했으며, 이는 당시 성도들에게 임박한 종말에 대한 생생한 경각심과 소망을 불어넣었습니다.
본론 2: 구약의 그림자 -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두 증인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는 요한계시록 11장 4절 자체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요한은 의도적으로 두 증인을 구약성경 스가랴 4장의 환상과 연결합니다. 이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증인의 상징적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스가랴 4장에서 선지자 스가랴는 순금 등잔대(촛대)와 그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 환상을 봅니다. 여기서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슥 4:14)로 설명됩니다. 당시 문맥에서 이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이끌던 지도자, 즉 정치적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과 종교적 지도자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무너진 성전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즉,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를 상징하며, 그분의 백성을 이끄는 왕적-제사장적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스가랴의 환상을 요한계시록에 적용하면, 두 증인은 단순히 두 명의 개인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아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세우고 진리를 증언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로마 제국, 혹은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 세력)에 의해 영적 성전인 교회가 핍박받는 상황 속에서, 두 증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그의 백성을 지키는 영적 지도력의 원형(archetype)으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는 개인의 신원을 넘어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과 '역할'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본론 3: 상징적 해석 - 교회 공동체로서의 두 증인
교부들의 문자적 해석과 스가랴서의 배경을 종합할 때,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상징적 해석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두 증인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 자체, 혹은 그 증언 사역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증언의 유효성'을 상징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어떤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신 19:15). 따라서 '두 증인'은 교회가 세상 앞에서 행하는 증언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법적이고 참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촛대'(마 5:14-16)이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살아가는 '감람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 관점에서 두 증인의 사역은 교회의 사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 예언 사역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 교회는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합니다. '굵은 베옷'은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적 권위와 고난을 상징합니다.
- 고난과 순교: 두 증인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모습은, 역사 속에서 교회가 세상 권력으로부터 겪게 될 박해와 순교를 상징합니다.
- 부활과 승천: 그러나 그들은 3일 반 후에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며 최종적인 승리를 얻을 교회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예표합니다.
따라서 두 증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전체 교회, 혹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성경, 또는 교회의 왕적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상징하는 다층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두 증인의 이야기를 특정 시대의 특정 인물에게 국한하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본질로 확장시켜 줍니다.
결론: 시대를 초월한 증인의 사명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단일한 정체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심오한 상징입니다. 초기 교부들이 보았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와 맞서 싸울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강력한 예언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스가랴의 환상을 통해 드러나듯,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아 영적 성전을 재건하는 왕과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궁극적으로 두 증인의 정체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해는 이들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를 외쳐야 하며, 때로는 순교를 각오하고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패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리입니다.
따라서 '두 증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두 증인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천적 질문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은 과거의 인물이나 미래에 올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거룩한 부르심이자 정체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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