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예언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시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자기의 분깃으로 삼는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에 관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시편 16편 1절-7절, 하나님과의 대화와 그에 대한 확신 - 주석과 해설 정리
이 시편에는 "믹담"(Michtam)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황금"의 시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가치 있고 금보다도, 정금보다도 더 귀중한 시로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의 영역에서 감추어져 있는 참된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대해 매우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확신
다윗은 여기에서 믿음이 있는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하나님의 보호로 뛰어들고 있다(1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특히 죄로부터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피하나이다."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거룩한 돌보심에 의탁하고, 스스로 거룩한 인도에 복종하는 자들은 그 두가지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버지여 나를 이 시간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실 것을 믿으신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는 다윗의 결단
그는 그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그 자신이 엄숙히 헌신될 것을 인식하고 있다(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여호와이시오니 나는 담대히 주를 의지할 수 있다 하였나이다."
1.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우리의 의무
주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복종시켜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아도냐"는 "나의 옹호자," 내 마음의 힘을 의미한다.
2. 이것은 우리 영혼으로써 행해져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그것을 말했도다"(우리 성경과 다름: 역주). 하나님과의 언약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일에 전념하고 그것으로써 속박되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을 그들의 주님으로서 공언하는 자들은 자주 그들 자신에게 그들의 행한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는 주는 나의 주시오니라고 주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다시 말하고, 그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지키라. 그리고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는 그것을 말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을 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라. 그는 너의 주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하라. 그리고 네 눈은 항상 그를 향하라."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다윗
그는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그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있다(2,3절). "나의 선함이 당신께는 이르지 못하나 성도들에게는 이르나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시하라.
1. 주께서 성도들에게 행복을 주신다.
주님을 자기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그와 같이 선하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선함이 없이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2.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어떤 선함이 우리에게 있든지, 또는 우리에 의해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한 행동에 의해 공적을 쌓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봉사가 필요치 않으시다. 그는 그것에 의해 유익을 얻지도 아니하시며, 그것도 또한 그의 무한하신 완전함과 축복에 더 보탬이 될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선하며 가장 유용한 자들도 하나님께 유익할 수는 없다(욥 22:2; 35:7).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위에 계시며 우리 없이도 행복하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든 그것은 모두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지 그가 우리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윗도 이것을 인정하여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하고 있다.
3. 우리의 선함을 지키라.
하나님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위해 우리의 선함을 그의 것인 자들, 즉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르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그의 수납인으로 세우신 그는 그들에게 베풀어진 것을 그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여겨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1) 땅에는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땅위에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늘에서 성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전념하는 자들은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
(2) 땅에 있는 성도들은 뛰어난 자들이며, 위대하고 위력하며 존귀한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 세상에서 너무 궁핍해서 다윗의 선함이 그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은혜로써 그들을 뛰어나게 만드신다. "의로운 자는 이웃들 중에서 뛰어나리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탁월한 자로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영예롭다. 그들은 그의 보석, 그의 독특한 보물이다. 그들이 하나님은 그들이 형상이며, 그들에 대해 아름다운 왕관이시다.
(3) 주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그의 성도들을 뛰어난 자들로서 여겨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왕이었을지라도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의." 심지어 가장 비천한 자의 "동무"(119:63)였는데 이것은 그의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표시였다.
(4) 우리는 성도들을 기뻐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의 선함이 그들에게 이르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친절을 그들에게 베풀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주며, 그들에게 풍성한 사랑의 수고를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 될 수 있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구원은 하나님께 아무런 소득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멸망이 그에게는 조금의 손실도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선함과 유익은 우리 인간에게 미친다. 그는 인자들을 기뻐하시며(잠 8:31),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신다(요 17:19).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의 연약함과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 성도들을 기뻐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기뻐해야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
우상 숭배는 거부되어져야 한다.
그는 그릇된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4절).
1. 그는 우상 숭배자들의 파멸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에 미쳐서 다른 신을 좇기에 바쁘며, 마치 그 우상들로부터 벗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자처럼 열심히 그것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들의 괴로움이 더할 것이다." 그 괴로움은 그들이 버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온 심판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받아들이는 그릇된 신들에게서 느끼는 실망에 의한 것이다. 신들의 수를 늘리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더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이신 하나님은 부족하게 여기는 자는 두 개의 신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수 백 개의 신들도 충족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시인은 우상 숭배자들과 관련이 없음을 고백하다.
그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 혹암의 무익한 일과도 관계를 갖지 않으려는 자기 결심을 선포하고 있다.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로다. 그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신은 거짓될 뿐만 아니라 그 제물조차도 야비하기 때문이다." 피는 속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에서 피를 마시는 일은 매우 엄격히 금지되었고, 제주는 포도주를 썼다. 그러나 마귀는 그의 숭배자들에게 제물의 피를 마시는 잔인성을 배우도록 그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나는 피비린내 나는 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겠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내 입에 올릴 때 그들에 대한 어떤 기쁨이나 존경심도 품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완전한 증오로써 우상과 우상 숭배를 미워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또한 그리스도와 그이 사업에 적용시키면서 그가 제시한 제물의 특수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율법에 따라 바쳤던 것은 소와 염소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열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그 자신의 피였다), 또한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의 슬픔이 더해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유대인들은 다른 왕, 가이사를 좇기에 바빴었고, 여전히 다른 메시야를 좇기에 바쁘나 그들의 찾음은 헛된 일인 것이다.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하였다.
그는 그의 소득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엄숙히 택하였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으며(5절), 그 선택으로 인한 즐거움을 취하고 (6절)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7절), 이것은 헌신적이고 경건한 영혼이 그 은혜로운 경험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그의 소득과 행복을 위해 여호와를 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된 유익을 위해 세상을 취하며, 그들의 지복을 그 즐거움 속에 둡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는 내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라고 말하겠습니다. 곧 내가 선택한 소득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내 상태가 초라해지더라도 나는 기쁘게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부어 주시고 내가 그에게 용납되게 하소서. 내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즐거움을 주시고 그의 은혜와 즐거움을 얻는 만족을 주소서. 내게 그의 약속 가운데 있는 유익을 주시고, 약속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미래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주소서. 그러면 나는 충분할 것이며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내 지복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훌륭하고 지혜롭게 행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산업과 잔의 소득으로 여겨야 한다.
(1) 그는 저 세상에서 우리 산업의 소득이 되신다. 천국은 산업이다. 거기서 하나님 자신이 성도들의 산업이시며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은 그러한 그를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산업, 우리의 가정, 우리의 휴식, 우리의 영속하는, 영원한 선으로 여겨야 하며, 이 세상을 우리가 여행할 때 지나가는 나라 이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2)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양육되고, 활기를 회복하며 기절하지 않도록 해 주는 우리 잔의 소득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것에 순응하지도 않고, 이 현재의 모든 괴로움을 상쇄시키고 환난의 가장 쓴 잔을 달게 해 주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여기지 않는다.
2. 이 소득을 그가 안전케 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것이 되심을 약속으로 밝히신 주님은 은혜롭게도 약속하신 것을 잘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빼앗기도록 나 홀로 남겨 두시지는 않을 것이며, 도적질해 가도록 그것을 나의 대적들의 세력 안에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나를 당신으로부터 탈취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나를 주의 사랑에서, 다윗의 그 확실한 긍휼에서 떼어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도들과 그들의 복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3. 이 소득을 기뻐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다(6절).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 하나님을 자기 소다운 산업을 가진 자들이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그들이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떤 것을 더 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영혼이여, 너의 안식처로 돌아오라." 그리고 더 이상 바라지 말라.
은혜로운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더욱 열망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의 것은 결코 열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자비하심이 확인될 때 그들은 그 자비를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고, 세속적인 환락과 관능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 속에서 자신을 진실로 행복하게 여기며, 그들이 바라는 것 속에서 온전히 행복해질 것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알려지고 숭배되어지는 빛의 땅에, 소망의 계곡에 자기의 분깃을 정한 자들은 그러한 면에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도다"라고 말할 만하다. 수단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갖고 있는 자들, 즉 임마누엘의 땅 뿐만아니라 임마누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더욱 그럴 만한 것이다.
4.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있다.
그것에 대해 그리고 이 지혜롭고 행복한 선택을 하도록 만든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7절). "그는 내 소득과 행복으로 택하도록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지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눈을 쫓게 된다면, 우리는 매우 무지하고 어리석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망상을 택할 것이며 거짓되고 헛된 것을 위해 우리 자신의 긍휼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으 소득으로 취하고, 감각적이며 일시적인 것들보다도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지시하시고 능력을 주신 거룩한 은혜의 능력과 선하심을 감사하게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찬미를 드리도록 하자.
5. 그것을 선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를 훈계하셨을 때 그 자신의 "심장"(그 자신의 생각)도 또한 밤중에 그를 그르쳤다. 그가 조용하고 한적했을 때, 그리고 세상에서 물러났을 때, 그 자신의 양심은 ("심장"이라 불리우고 있다. 렘 17:10) 그가 만든 선택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회고했을 뿐만아니라, 이 선택에서 야기되는 의무에 대해 그를 가르치거나 훈계했으며, 그에게 시험하여 물어 보았다. 그리고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향해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자신의 소득으로 택한 자로서 살아가도록 그를 격려했고, 또 촉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으셨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를 자기 소득으로 삼았고 그 소득을 기뻐했다.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그의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구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을 그의 음식과 음료로 여겼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분깃을 지켜 주시고 그로 그 사업을 완성하도록 해 주실 것을 믿었으며, 그의 일을 수행하고 그 아버지의 훈계를 쫓기를 기뻐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이것을 노래로써 기록한 안심과 만족을 지니고 하나님을 우리의 것으로 선택한 사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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