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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주석] 시편 22편 1절-10절, 슬픈 원망 - 주석과 해설 정리

시편 22편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원수의 조롱과 박해 가운데 고통 받는 시인이 처절한 탄식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비록 고난과 박해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본 시는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입니다.


시편 22편 1절-10절, 슬픈 원망



시편 22편 1절-10절, 슬픈 원망 - 주석과 해설 정리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의 표제, "아얠렛샤할"(Aijeleth Shahar)- 즉 "어린 암사슴"이라는 표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향기로운 산들의 어린 사슴과도 같이 날렵했고(아 8:14).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사랑스런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 같았다(잠 5:19). 그는 "놓인 암사슴"에 비유된 납달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창 49:21). 그는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있는 어린 암사슴이다(16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이 시편의 곡조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물러가심을 슬프게 원망함(1,2절).


1.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다.

이것은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밤낮으로 그를 계속 부르고 그의 은혜로운 응답을 진정으로 갈구했지만 응답도 도움도 받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서 진심으로 위로를 호소하는,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처럼 하나님의 불유쾌하심에 눌려 그 밑에서 신음하고 그가 은총의 표적을 나타내시기를 원하는 다윗이나 하나님의 어떤 자녀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1) 영적으로 황폐한 상태는 성도들에게 가장 쓰라린 환난이 된다. 하나님의 증거가 가리워지고 거룩한 위로가 의심스러워지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당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자기들을 사로 잡을 때, 사람들의 영은 얼마나 슬프며 그들의 모든 위로는 얼마나 위축되겠는가!

(2) 이러한 괴로움을 원망하는 것까지도 영적 생활과 영적 사려의 시련을 나타내는 좋은 표시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내가 아픕니까? 어찌하여 내가 궁핍합니까? 하고 부르짖는 것은 불만과 속된 마음을 의심해보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그 행복을 두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언어이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물러가심을 탄식할 때에도 우리는 그를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하며, 그를 우리들의 것으로 여기며 요청하기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믿음이 부족할 때 우리는 믿음에 고수하여 살아가야 한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간데,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나를 죽게하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하리라. 비록 그가 내게 즉시 응답하지 않으실 지라도 나는 계속 기도하고 기다리리라. 비록 그가 잠잠하시더라도 나는 잠잠치 않으리라."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짖으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도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첫 원망의 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토로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마 27:46). 아마도 그는 이 다음 구절들도 계속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의 의견대로 소리내어 크게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왜냐하면 그들이 이 첫 번째 말을 트집잡았기 때문이다)속으로는 이 시편 전체를 반복하셨을 것이다.

(1) 그리스도는 그이 고난 중에 그의 아버지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그와 함께 계실 것을 간곡히 호소하셨다. 그는 "낮에도"십자가 상에서 부르짖으셨고, 동산에서 심히 번민하시던 "밤에도" 부르짖으셨다. "그는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을 올렸고"거기에는 일종의 두려움도 또한 섞여 있었다.(히 5:7).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고 그를 도우시기는커녕 그의 기도도 듣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가 어떠한 그의 고난보다도 더욱 원망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대적들의 손에 넘기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정해진 뜻에 의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육신적인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죄에 대한 그의 진노와 불쾌하심을 그에게 부과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사 53:10).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그의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굳게 지키셨다. 즉 그는 하나님께 고용되어 그를 섬기셨으며, 곧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실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믿음


그 원망에 대한 격려(3-5절).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그를 돕지 않으셨지만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1. 그는 하나님에 대해 선하게 생각할 것이다.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어떠한 시여도 불의하거나 거짓되거나 잔인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의 환난당하는 백성들에게 즉시 위로를 주시지 않을지라도 주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진실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합 1:13). 그리고 주께서는 무한히 정결하시고 의로우시므로 주의 의로운 백성들의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주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나이다. 주는 주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시기를 즐기시며 주의 백성들이 찬송을 올리고 있는 성소에 특별히 임재하심을 나타내시기를 즐기십니다. 여기에서 주는 항상 그들의 경의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회중이 모이는 성소에 대해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충성스런 숭배자들에 대한 그의 놀라우신 겸양을 나타내고 있다-(즉 하나님은 천사들의 찬송으로 섬김을 받으실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기를 즐기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모든 원망 속에서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비록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귀를 막고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는 그의 백성들의 찬송을 매우 즐거워하시므로 합당한 때에 그들에게 그들의 음성을 변화시킬 기회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 우리 주 예수는 그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주시하여 그것에 대한 경의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려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바치는 거룩한 것들이 허물 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그의 은혜의 거룩함의 주시하셨다.


2.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위안을 준다.

그는 전 세대에 성도들이 믿음과 기도로써 유익을 얻었던 그 경험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것이다(4,5절). "우리 열조가 주께 부르짖어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합당한 때에 나를 건지실 것입니다. 주께 소망을 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했고 주를 구한 자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한결 같으시며 예전에 주의 백성들에게 대해 주셨던 것과 똑같이 대해 주십니다.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었으며 주의 백성들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롬 1:28)." 언약의 유업은 믿음의 후손들을 돕기 위해 마련되어 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셨던 자각우리의 하나님이심에 틀림 없으므로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그의 고난 가운데 이러한 사실-즉 고난을 당하신 그의 모형이 되는 모든 조상들, 노아, 요셉, 다윗, 요나 등은 합당한 때에 구원되었고, 또한 그의 들리우심의 모형이 된 사실로써 스스로를 격려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아셨다(사 50:7).



또 다른 근심으로 야기된 원망


그것은 사람들의 경멸과 조롱이었다. 이 원망은 이전에 그가 하나님께서 물러가셨을 때 원망하던 것처럼 그렇게 비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한 은혜로운 영혼을 건드린 것처럼 그렇게 비통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매우 상하기 쉬운 고결한 영혼을 건드리고 있다(6-8절).

우리 조상들은 영화롭게 되었었다. 즉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 당대의 초기, 또는 말기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위대하게 나타났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한 단계 내려섰다는 것으로 큰 겸양이었으며, 그것은 천사들의 경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람이 되시는 것이 너무 과분하고 큰일인 것처럼 그는 사람이 아닌 벌레가 되고 있다. 그는 "아담"-즉 "더러운 사람"이었고, "에노스-즉"슬픈 사람"이었으며, "로 이쉬"-즉 "보잘 것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던"것이다(사 52:14). 사람은 고작해야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그 자신을 벌레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그처럼 짓밟히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단어는 주홍이나 자색을 물들이기 위해 사용되었던 벌레를 의미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피흘리는 고난을 언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어떤 굴욕을 당하셨는가를 보자.


1. 비방 당하신 예수님

그는 악인으로서, 불경스러운 자, 안식일을 범한 자, 음주가, 거짓된 선지자, 가이사의 대적으로서, 그리고 마귀들의 왕과 동맹한 자로서 비방당했다.


2. 무시 당하신 예수님

그는 천하고 경멸할 만한 자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는 자로서, 그의 나라에서 명성이 없으며 초라한 목수의 혈통을 지닌 자로서 관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닌 어중이떠중이들을 추종자로 갖고 있는 자로서 멸시당했다.


3. 어리석은 자로 여김 받으신 예수님

그는 어리석은 자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속이는 자로서 조롱 당했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을 본 자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염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몰락을 비난하는 무례한 온갖 몸짓과 표현을 다함으로써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그를 향해 입을 비죽거렸고 그를 희롱했으며, 그의 고난을 조롱했다. "저희가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이 사람이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실 것을 신뢰한다"고 말한 자이니"이제 구원하실걸 하나이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인해 때로 빈정거림을 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서 이것은 정말 글자 그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바로 이러한 동작들이 그를 모욕하던 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마 27:39). 즉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의는 그들이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43절)이라는 바로 그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스스로 잊게 했다. 우리 주 예수는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께 행했던 영예롭지 못한 일을 대속하려 하셨을 때, 가장 비참한 모욕과 수치에 굴복하심으로써 그것을 행하셨다.



이 원망에 대한 격려(9,10절)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나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 다윗과 그 밖의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저희 열조의 하나님(4절)이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자마자 곧 그들을 돌보기 시작한 그들의 요람시대의 하나님이셨으므로 그가 결코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소망으로써 흔히 그들 자신을 격려했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 주고 있다. 도움 없고 무력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위해 매우 은혜롭게 행하셨던 하나님, 우리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일으켜 세우시고 키워주셨을 때 우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일찍부터 우리를 돌보시는 것을 보라.


1. 출생 때.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거기서 죽었거나 태어나는 도중 질색했을 것이다. 일반적 시간이 하나님 존재의 함축성 있는 증거, 즉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의 개인적인 시간은 하나님의 섭리의 풍요한 증거와 더불어 시작한다.


2. 품 속에 있을 때.

"주께서 나를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즉, "주께서 내게 영양을 공급해 주시고 내가 당하게 될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심으로써 그렇게 의지하게 해 주셨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주께 의지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모친의 젖을 먹을 때의 축복은 태의 축복에 대한 유종의 미인 동시에 우리 일평생의 축복에 대한 전조이다. 그때에 우리로 젖을 먹게 했던 그가 결코 우리를 굶어 죽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욥 3:12).


3. 우리가 일찍이 그에게 헌신되어졌을 때.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나이다." 아마도 이것은 팔일째의 할례를 언급하는 말일 것이다. 그때 그는 그의 부모에 의해 그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께 맡겨졌고 바쳐졌던 것이다. 할례는 언약의 날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매우 일찍부터, 매우 엄숙하게 "하나님의 위엄의 날개 아래 모여든" 자들은 그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다.


4. 하나님의 공급을 받을 때.

우리가 우리에게 언제나 꾸준히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보존시키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체험을 얻을 때.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즉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오늘날까지. 내게 유익한 것을 공급하시고 나를 돌아 보신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성(理性)을 활용할 능력이 생기자마자 하나님을 신뢰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길을 그에게 맡겼다면, 우리는 그가 항상"우리 소년 때의 우의와 우리 결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시리라는 (렘 2:2) 사실 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 적용될 수 있다. 즉 그가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우시고, 곧 헤롯의 악으로 인해 애굽으로 도망하셔야 했을 때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성육신과 탄생을 특별히 돌보셨던 것이다. 그가 어렸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 내셨다"(호 11:1).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고난 중에 있는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방했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를 위축시키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를 격려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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