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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주석] 시편 6편 1절-7절, 다윗의 호소 - 주석과 해설 정리

시편 6편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은, 시인이 범죄로 인하여 겪고 있는 심한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고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의 진노를 거두시고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시인의 기도에 대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시편 6편 1절-7절, 다윗의 호소 - 주석과 해설 정리



시편 6편 1절-7절, 다윗의 호소 - 주석과 해설 정리


여기에서 교만을 꺾는 섭리 아래서 진실로 겸손해진 마음에서 우러나온 언어가 있으며, 양심을 일깨우고 타락을 수치스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내진 큰 환난 아래서 상심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심령에서 우러나온 언어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박하실 때 부르짖지 아니하는 자들은 진노를 쌓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 아래서 여기에서의 다윗처럼 눈물을 흘리는 자들은 궁휼을 받을 만한 자들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그는 하나님께 그의 근심을 진술하고 있다.


그는 그 앞에 불평을 쏟아 놓았다. 자식이 자신의 불평을 자기 아버지에게 갖고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지고 가겠는가?


1. 그는 육신의 고통과 병을 호소하고 있다(2절).

"나의 뼈가 떨리나이다." 그의 뼈와 살은 욥의 것과 같이 상했다. 다윗이 비록 왕이었을지라도 아팠고 고통을 당했다. 장엄한 그의 면류관도 그의 머리에서 통증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훌륭한 자들도 인간이며 인생의 공동적인 재앙에 지배받고 있다. 다윗이 강건한 자였고 어렸을 때부터 용사였을지라도, 그것이 병으로부터 그를 방어해줄 수는 없었다. 병는 강한 자들까지도 곧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것이다. 다윗이 선한 자였을지라도 그의 선함이 그의 건강을 지켜 줄수 없었다." 주여 보옵소서. 주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도 이러한 육신의 병을 얻어 왔고, 우리도 그러한 경우에 그들의 본을 따라, 인생을 위하시고 그 육체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고통을 보이도록 지시받고 또 격려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 우리의 고통과 병을 완화하도록 해야 한다.


2. 그는 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그것은 뼈의 아픔보다 더욱 극심한 것이다. 좋은 상태에 있을 때"인간의 정신은 그의 질환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당할 땐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다윗의 병은 그에게 그의 죄를 기억케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를 불쾌히 여기시는 증거로 간주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떨리게 했고 그로 하여금"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하고 부르짖게 했다. 사람의 뼈와 영혼이 동시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이 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복잡한 고통을 더욱 극심케 했다. 이러한 상황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3절)하는 호소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앗수르 사람들이나 에글론의 신들에게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시는 유일한 의사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아뢰어야 한다.



그의 고통이 그에게 준 느낌.


그것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그는 "탄식함으로 곤핍하였고, 그의 침상을 띄우며 그 요를 적실" 정도로 울었고(6절) 거의 그의 눈이 쇠할 때까지 울었다(7절).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나이다." 다윗은 외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이처럼 슬퍼하지 않았고 좀더 용기를 갖고 또 깊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죄가 그의 양심을 무겁게 누르고, 그가 불의를 범하게 되어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생각과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축출되었다는 생각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 그는 이처럼 근심했고 몰래 슬퍼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눈을 항상 깨어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눈물을 흘리게 했다.


1. 가장 훌륭한 자들은 흔히 슬픈 자가 되는 운명을 가져왔다.

우리 주 예수도 그러하셨다. 우리의 길은 눈물의 계곡을 지나 있으며 우리는 그 풍토에 적응해야 한다.


2. 가장 위대한 영혼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 아래서도 온유하고 너그럽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골리앗과 그 밖의 용감무쌍하게 도전해 오는 대적들과 맞설 수 있었던 다윗이었지만 죄를 기억하고 거룩한 진노를 깨달았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그의 품위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3.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은 은밀한 곳에서 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애곡함을 나타내기" 위해 얼굴을 가장했다. 그러나 다윗은 누워 심중에 의논했던 그 침상에서 밤중에 슬퍼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근심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보시는 이가 목격자가 되셨다. 베드로도 밖에 나가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4. 죄에 대한 슬픔은 큰 슬픔이어야 한다.

다윗의 슬픔도 그러했다. 그는 요가 젖을 정도로 심히 통곡했다.


5. 사악한 자들이 성도들의 슬픔에 개가를 부르는 것은 그들을 더욱 근심케 한다.

다윗의 눈은 그의 통곡을 즐거워하고 그의 눈물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그의 대적들로 인해 쇠하였다. 이 큰 슬픔 속에서 다윗은, 자주 눈물을 흘리셨고 "내 영혼이 심히 슬프도다" 하고 외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고 있다(히 5:7).



그는 이처럼 슬프고 곤경스러운 상태 속에서 하나님께 탄원을 올리고 있다.


1. 그가 가장 큰 재앙으로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였다.

이것은 그의 환난과 비참함에 있어서 쓴 담즙과 같았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것을 정말 쓴 잔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비록 내가 그것을 받을 만해도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으며(1절). "여호와여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고 나를 징계치마옵소서"라고 간구하지는 않고 있다. "대너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징계와 동시에 자신의 얼굴을 들어 그에게 비추시고 주의 성령으로 하여금 그가 사랑하신다는 기쁘고도 반가운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신다면, 그 징계와 견책을 충분히 참을 수 있다. 만일 그가 영혼의 위로를 얻는다면 육신의 고통은 참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않는다면 그의 뼈의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소서. 내가 그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나를 몰락시킬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는 중에 그리스도의 가장 쓰라린 호소는 그의 영혼의 고통에 대한 것과 그의 아버지의 미소를 의심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대적들의 분노에 대해 "어찌하여 그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밖습니까?" 하고 호소하거나, 그의 친구들의 배반에 대해 "어찌하여 그들이 나를 버리나이까?"하고 호소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크게 소리 지르셨다." 우리도 이처럼 어떤 외적인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를 쌓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2. 그가 가장 훌륭한 선으로서 열망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게 될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우정이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매우 비참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비참한이란 긍휼히 가장 합당한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기에서 "여호와여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분노 속에서 긍휼을 기억하시고, 나를 엄격한 공의로 다스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것은 긍휼에 합당한 행위이고 흔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하는 탄원의 주된 의도가 되고 있다.

(3)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셔서 그를 위로하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고치소서(2절). 나를 구원하소서(4절). 그 말씀만 해 주옵소서. 그러면 나는 온전한 것이며 모든 것은 잘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화목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여호와여 돌아와 주의 은혜로 다시 나를 받아 주시옵고 나와 화해하소서. 주께서 나를 떠나시고 나를 소홀히 여기시며, 노한 자처럼 나를 멀리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여 돌아 오시어서 내 가까이에 계심을 보여 주소서."

(5) 육신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속 사람과 그 육익을 특별히 보존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그것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침잠되지 않도록, 영원히 파멸되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우리의 특권이며, 그 앞에 나아가 이처럼 그리 정성껏 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강력한 탄원은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하나님은 우리가 진술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의 사정과 그 참된 공적을 더 잘아신다) 그 자신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


1. 그는 자신의 비참함과 그 비참함이 오래 지속된 것을 탄원하고 있다.

"내가 수척하였사오며, 심히 괴롭힘을 당하고 있사옵니다. 여호와여. 이러한 상태가 어느 때까지 이니이까?


2.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도에 대한 매우 훌륭한 격려를 얻을 수 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탄원하고 있다(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시면, 나는 내 구원에 대한 감사를 주께 드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감사하도록 촉구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게 맡기신 새로운 생명을 주의 봉사와 주의 영광에 바치고,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내 일생동안 감사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일에서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나는 주를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행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오직 구별된 영혼만이 살아 행하며, 신실한 영혼은 기쁘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한다.

(1) 그러나 두 번째 죽음 속에서(아마도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혼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죽음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하나님을 즐겁게 기억하는 일이 없다. 마귀와 저주받은 영들은 그를 모독하고 그를 찬미하지 않는다. "주여 나로 항상이 진노 아래 있게 하지 마소서. 왜냐하면 그것은 저승이며, 그 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나로 하여금 영원 불변토록 주를 찬미하는 가운데 있게 하소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 그를 찬미하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자들은 믿음으로 이렇게 간구할 것이다. "주여, 나를 무서운 곳에 보내지 마옵소서. 그곳에는 열심히 주님을 기억하는 일도 없으며 주께 감사하는 일도 없습니다."

(2) 몸의 죽음조차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의 기회와 능력을 종식시킨다. 또한 암흑의 권세에 대항하고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인도함으로써, 그의 나라의 권세를 도울 기회와 능력도 종식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기쁨은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의 즐거움보다 더욱 그리고 무한히 바람직하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그러나 땅 위에 있는 성도들, 특히 다윗처럼 뛰어난 자들의 봉사는 죄와 사탄을 대적하여 계속 싸우는 일이나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세우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하늘의 성도들의 봉사보다도 더욱 칭찬할 만하며 그 거룩한 은혜의 영광에 더욱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궁중에 있는 신하들은 지극히 행복하지만 싸움터에 있는 군병들이 더 유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리고 그가 우리나 우리 친구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일을 더 갖고 계시다면, 그가 우리나 우리 친구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일을 더 갖고 계시다면, 그가 우리나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를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은 성도들 자신에게는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육신에 거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더욱 유익하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고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누구리이까?"하고 탄원했었다(30:9; 88:10; 115:17; 사 38:1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씀했을 때,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중에 있다면 이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고 이 구절들을 노래해야 한다. 그 진노는 우리가 그 무엇도 두려워하고 면하기를 바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진노하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겪는 자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고통을 당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경우가 전례에 없는 일이 아니며, 우리가 다윗처럼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간구한다면 오래지 않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우리를 위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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