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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주석] 다니엘 3장 19절-27절, 풀무 속의 세 사람 - 주석과 해설 정리

다니엘 3장 19절부터 27절까의 말씀은, 황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드록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느부갓네살 왕이 분노하며 불 가마에 던지게 하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과 결단을 묵상하고 새벽설교하기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3장 19절-27절, 풀무 속의 세 사람



다니엘 3장 19절-27절, 풀무 속의 세 사람 - 주석과 해설 정리



풀무불에 던져진 세 사람들


하나님의 신실한 세 종은 풀무불 속으로 던짐을 당한다. 느부갓네살은 참 하나님께 대해 많이 알고 또 많은 것을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교만과 허영심에서 금 신상을 건립하여 경배를 강요했다고 하나 이 청년들의 말에 그가 새삼스레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는 전에 이들이 자기의 모든 박사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최소한 그는 이들의 우상 숭배 거부를 이유 있다고 생각해 주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1. 느부갓네살의 분노

그들의 말에 각성하긴 고사하고 그는 열화같이 노하고 한층 난폭해졌다(19절). 그는 분이 가득하고 그들을 향해 낯빛을 변했다. 사람이 격정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 난폭해지고 심지어 안색이 변하여 지혜있고 이성있는 사람에게 큰수치가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진노함으로써 옥좌에 앉은 군주의 위엄과 재판석에 앉은 재판관의 존엄을 그물에 걸린 들소의 무서운 분노와 바꾸었던 것이다. 격노한 자들이 거울 속에 바친 자기 얼굴을 보기만 한다면 자기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며 그 모든 노여움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될 것이다.


2. 느부갓네살의 명령

이들의 자질과 존귀한 직책을 참작하여 처벌을 완화시키기는커녕 느부갓네살은 풀무를 최고로 가열시키라고 명령했다. 즉 그는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에 다른 행악자의 처형시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 고 명령했다. 그는 연료를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많이 넣으라고 명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보다 빨리 끝내게 할테지만 여기에는 왕이 이들의 죄를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칠 배나 더 악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죽음을 보다 치욕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난 폭군의 미련한 실례 속에서 영광을 이끌어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일이 그들의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긴커녕 그들의 구원을 보다 혁혁하게 해 준 까닭에서이다.


3. 세 사람을 풀무불에 던지라

왕은 이들을 옷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한 풀무불 속에서 던지라고 명하였고 그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20,21절). 그들을 결박한 것은 몸부림치거나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옷입은채 결박한 것은 왕의 명령이 급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들을 보다 서서 그리하여 그리고 차츰차츰 태워 죽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한 것은 기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의 옷조차 그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적이 더욱 많은 평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은 마치 그들의 죄에 대한 혐오감으로 그들의 옷도 그들과 함께 태워버리려는 듯이 그들을 고의와 속옷과 곁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채 결박하였다. 이런 죽음은 얼마나 두려운가!(23절)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는데 그런 자를 붙잡다니 얼마나 두려운가! 폭군이 그런 형벌을 내릴 만큼 강퍅하다는 것과 신앙 고백자들이 하나님께 독죄하느니 이런 형벌을 감수하겠다고 할 만큼 담대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어떠한가?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저 풀무 속으로 던져버리고 불과 유황불로 영원히 타오르는 불 못으로 던지는 둘째 사망은 이에비할 바가 아니다. 느부갓네살이 자기 풀무를 최고로 뜨겁게 달군다고 해 보았자 그 속에 던짐을 당하는 자의 고통은 몇 분이면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옥불은 고통만 줄 뿐 죽이지는 않는다. 저주받은 죄인의 고통은 보다 격렬하여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한 자는 쉼을 얻지 못하며 중보도 얻지 못가고 고통의 중단도 없을 것이다(계 14:10, 11). 이에 반해 바벨론의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다고 해서 풀무불에 던짐을 당한 세 사람의 고통은 곧 끝날 터였다.


4. 세 사람을 던진 용사들이 불타다

이들을 결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진 용사들 자신이 불꽃에 타죽거나 질식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섭리였다(22절). 이 세 사람을 빨리 불 속에 집어넣되 효과적으로 틀림없이 집행하라는 왕의 명령은 엄했다. 용사들은 이 세 사람을 풀무 가운데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풀무 입구까지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자기를 보호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다니엘에 관한 외경에 의하면 화염이 풀무 입구에서 49 규빗이나 치솟았다고 한다. 아마 하나님께서 바람을 명하여 불길이 직접 그 용사들에게 맹렬히 닿아 그들을 질식시켰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피해입은 자기 종들을 위해 신원하시며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 행위 그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그 범죄 행위로써도 박해자들을 벌하셨다. 그러나 이들 용사들은 잔혹한 일의 하수자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는 더 큰죄를 범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용사들은 부당한 명령을 집행했으므로 화를 입어 마땅하다. 이들은 아마 왕의 명령을 쾌히 집행하고 이 일에 종사하게 됨을 기뻐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나중 계산을 위해 예비된 셈이었다. 교만한 폭군들이 벌받을 날은 오고 있다. 그 날에는 그들이 범한 잔혹 행위 때문에 벌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잔혹한 일에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한 데 대해서도 벌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


하나님이 이 세 신실한 종들을 풀무에서 구출하심. 이들이 삼키는 불길 한 가운데로 던짐을 당했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그들의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으며 그들의 뼈가 회신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아직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1. 불 속을 거니는 세 사람들

느부갓네살은 그들이 불 속에 거닐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놀라 급히 일어났다. 그의 판결을 집행하던 자들의 죽음이 그를 놀라게 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차례는 느부갓네살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느낌을 받아 놀라서 급히 일어났을 것이고 그 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풀무로 갔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해 마음이 극히 강퍅한 자들을 놀람으로 치실 수 있다는 떼 유의하자. 영혼을 지으신 분은 자기 칼로 영혼에 다가가게 하실 수 있으시며 강대한 폭군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경악한 가운데 그는 자기 주위의 모사들을 불러 묻는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그는 자기 주위의 모사들을 불러 묻는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 일은 왕의 명령뿐만 아니라 중신회의의 결정에 의해서도 시행된 듯하다. 그들은 왕이 행하도록 명령한 일에 동의함으로써 죄와 비난을 왕과 함께 받으려고 했으리라. 그들은 "왕이여, 옳소이다. 우리가 그 일의 집행을 명령했고 그 일은 실시되었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렇지만 내가 풀무 속을 들여다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가운데 다니는구나!" (25절)하고 말한다.

(1) 세 사람은 결박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들의 옷조차 그을지도 못한 불이 그들을 결박한 밧줄을 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괴롭히고 방해하기 위해 원수들이 주는 바로 그 시험을 통해 마음이 활달하게 된다.

(2) 그들은 상하지도 않았고 호소하지도 않았으며 고통을 느끼거나 최소한 불편을 느끼지도 않았다. 불꽃은 그들을 태우지 않았고 연기는 그들을 질식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화염 속에서도 여느 때처럼 살아있었다. 자연의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셔서 자기 목적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는 게 주목하자.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사 43:2)는 말은 이제 여기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불의 세력을 멸하며(히 11:34)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였다(엡 6:16).

(3) 그들은 불 가운데로 다녔다. 풀무는 커서 그들이 지닐만한 장소가 있었다. 그들은 상하지 않았기에 다닐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편안했기에 즐거운 낙원이나 동산처럼 거닐 마음이 생겼다.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않겠느냐?(잠 6:28) 그들은 두로왕이 화광석 즉 불처럼 번쩍이는 자기 보석 사이에서 즐거이 왕래하듯(겔 28:14) 불가운데로 다녔다. 그들은 자신이 상하지 않음을 보고 나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상하지 않음을 보고 나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불 속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구출도 맡겼다. 그들은 구출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불 가운데서 오르내렸다. 외경 중 하나는 세 사람 중 하나민 아사랴가 불 가운데서 한 기도와(여기서 아사랴는 이스라엘의 재난과 죄를 슬퍼하며 자기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한다) 세 사람이 불 속에서 부른 찬미의 노래를 대략 싣고 있다. 이들 기도와 찬송은 신앙의 훌륭한 요소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티우스처럼 이것이 후기의 어떤 유대인에 의해 저작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도와 찬미를 성서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4) 불 속에는 이들 셋 외에 넷째가 보였는데 느부갓네살의 판단으로는 그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 그는 신적 품성을 가지고 나타났고 하늘 사자로 나타났으며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혹자는 "천사와 같았다" 고 읽는데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호칭된다(욥 38:7). 외경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풀무로 내려왔다" 고 서술한다.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하나님이 극사자를 보내셨다" (28절)고 말한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있을 때 사자 입을 막은 것도 천사였다.(6:22). 혹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즉 피조된 천사가 아닌 언약의 사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육하시기 전에도 인간의 모습으로 가끔 나타나셨다. 이것은 때가 차면 세상에 오실 그의 위대한 사명을 참으로 적절히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택함받은 자들을 불 속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셔서 그들과 함께 다니신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은 그의 은혜로우신 임재가 고난 중의 그들과 함께 하신다 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심지어 극렬히 타는 풀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도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함께 행하시므로 그들은 해받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행한 일이 곧 자신께 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이로써 증명하셨다. 그들을 풀무 속으로 던지는 자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던지는 자들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 58:9 참조).


2. 풀무불에서 나온 세 사람들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풀무에서 불러낸다(26절). 그는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에 가까이 가서 그들에게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명했다. 그는 굉장히 인정스럽고 염려스럽게 말한다. 그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도우려는 자세로 서있다. 그는 그들이 기적적으로 보존됐다는 사실에서 자기가 악을 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을 가만히 내어보내지 않는다. 아니다, 그가 친히 와서 데리고 나가려 한다(행 16:37 참조). 왕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관찰하자. 그는 이들을 명예로운 칭호로 부른다. 느부갓네살이 이들에게 맹분을 터뜨렸을 때는 아마 반역자, 역신등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정한다. 그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그의 손에서 능히 건져낼 신으로 등장하신 것이다(15절 참조).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극히 교만한 자에게도 자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은 인간 중 가장 교만한 자보다 높으시며 그들이 큰소리치는 일로도 하나님께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신다(출 18:11).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누가 자기 종인지 알리시며 하나님 자신이 자기 종을 인정하고 그들의 편에 서신다는 것을 알리신다. 엘리야는 "주께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6)하고 기도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버렸던 자들을 이제 포옹한다. 그는 이들이 하늘의 총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하나님께서 박해자들의 눈을 여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전에 행한 핍박을 최대한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 모양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던 넷째는 물러갔는지, 보는 데서 승천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 세 사람에 대한 사실만 언급되고 있다.

(1) 그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이 갈데아의 우르(불이란 뜻)에서 나왔듯 불가운데서 나왔다. 유대 전승에서는 아브라함이 우상숭배를 거절하다가 불 속으로 던짐을 당했고 이들 세 사람처럼 불속에서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석방 명령을 듣자 바로 나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더 이상 지체치 않았다. 그들은 불에서 꺼낸 그을은 나무처럼 나왔다(슥 3:2).

(2) 그들은 모든 놀란 구경군들에게 전혀 상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다(27절). 그를 관찰하기 위해 내노라 하는 굵은 인물들은 부 모여들었고, 그들은 이들의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의 구주께서 자기의 고난받을 종들에게 어떤 실질적 피해도 입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시키고자 "너희 머리털 하나도 성치 않으리라" (눅 21:18)고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은 이 점에서 문자 그대로 옳은 말씀이었다. 그들의 옷은 빛깔도 변하지 않았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 하물며 그들의 몸이랴! 불은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다. 갈데아인들은 신의 한 형상으로써 숭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불을 억제하심으로써 그들의 왕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도 멸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려고만 하신다면 물뿐만 아니라 화염도 그 소리에 갈라진다는 것을 나타내셨다(시 29:7). 소멸하는 불이 되는 분은 우리 하나님뿐이시다(히 12:29). 그가 말씀만 하셔도 다른 불은 소멸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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