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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주석] 다니엘 4장 4절-18절,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 주석과 해설 정리

다니엘 4장 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 느부갓네살이 다시 꿈을 꾸게 되고 다니엘에게 그 꿈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매일성경큐티 자료와 새벽설교 자료로 쓸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4장 4절-18절,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다니엘 4장 4절-18절,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느부갓네살은 교만 때문에 자기에게 작용한 심판을 언급하기에 앞서 받은 따끔한 경고를 기술한다. 심판이 이르기 전 그는 경고를 받았고 거기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그는 심판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미리 그 일의 어떠함과 결과를 통고받는데 이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미리 받은 예언과 그 일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가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깨닫고 그렇게 발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그는 세상에는 신의 섭리뿐만 아니라 신의 계시도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믿게 될 터였다.

그는 꿈으로써 장래 일을 주목하였는데 우리는 그의 꿈에 대한 묘사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그에게 이 경고가 주어진 시간


그 때는 그가 자기 집에서 편히 있으며 그의 궁에서 평강할 때였다. 그 때는 그가 애굽을 정복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끝맺고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일은 그의 통치 34년이나 35년에 일어났다(겔 29:17). 그가 꿈을 꾼 것은 이 무렵이었고 그 꿈은 일 년 후 실현된 것이다. 그 후 칠년 간 그는 정신 질환을 앓고 나서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 무렵에 그는 이 조서를 썼고 2년 간 살다가 재위 45년 되는 해에 붕어했던 것이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피로해 있었고 지루하고 위험한 원정을 많이 감행했었는데 이제야 겨우 자기집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대적도 없고 악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들 중 가장 강대한 자들이 극히 안전한 가운데 쉬면서 평강하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들을 두렵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꿈에서 받은 인상(5절).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전쟁에 드나들면서 전쟁의 위험을 표정하나 변치 않고 보아왔던 자였다. 우리는 하챦은 일이 그를 놀라게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하나의 꿈으로도 그를 공포에 질리도록 만드신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침상을 부드럽고 편했을 것이다. 호위하는 자들도 그의 잠자리를 잘 지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침상에서 한 생각이 그를 편치 못하게 만들었으며 뇌속으로 받은 이상 곧 자기 상상의 산물은 그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극히 위대한 자가 자기 영혼에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눅 12:19)고 할때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교란자들, 수 만 명에게 고통을 준 자들을 바로 그들 자신에게 고통과 번민을 주는 자로 만드실 수 있으시며 강한 자의 두려움이 됐던 자들을 바로 그들 자신의 두려움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꿈이 몰고 온 경악과 인상에 의해 그는 그 꿈이 평범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 보내진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술객과 점성사의 무지함


그는 꿈의 의미에 대해 술객과 점성사들에게 묻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이제는 전처럼(2장) 그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꿈을 생생하게 기억했으나 그 꿈의 해서과 그 꿈이 예시하는 바를 알고 싶었다(6절). 명령은 곧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에게 하달되었다. 그들은 마술과 점으로써 동물의 내장은 검사하거나 별들을 관찰함으로써 장래 일을 예고한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왕은 그들 중 누구라도 그 꿈의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 모두가 출두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들은 유사한 경우에 이따금씩 왕에게 모종의 만족을 주었을 거이고 그들의 기수로 왕을 즐겁게 할 만큼 그의 의문에 대답을 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대는 어긋난다. 그는 그 꿈을 그들에게 고했다(7절). 그들은 꿈만 말해 주면 어김없이 해몽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2:12, 13) 그들은 그 해석을 그에게 알게 하지 못했다. 꿈 해석의 열쇠는 신성한 예언에 있었다(겔 31:3 이하 참조). 에스겔서에서는 여기의 느부갓네살처럼 암수르인이 교만 때문에 찍히는 나무로 비유되고 있다. 그것은 연구한 적도 정통하지도 못한 책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이 꿈으로 어리둥절하게 한 뒤 다니엘의 해몽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케 했다. 바벨론의 멸망의 다가올 때 그들의 사술과 진언과 별 보는 자와 점성사들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라던 이사야의 예언(사 47:12, 13)은 여기서 성취되었다.



다니엘에게 꿈 해몽을 요청하다.


왕은 다니엘을 청하여 이 꿈의 해석을 부탁했다. "그 후에 다니엘이 들어 왔다" (8절). 그 는 박수와 술객들이 악하다고 하여 그들과의 합류를 거절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니엘의 선함을 싫어하여 같이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왕이 다니엘보다 자기 술객들이 할 수만 있다면 해몽의 영광을 받도록 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다니면 박사들은 어른이었으므로(2:48) 다니엘은 전처럼 가장 마지막에 자문을 받게 되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삼고 모든 다른 구조의 가망성이 없어질때까지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많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몹시 칭찬하며 자기가 부여한 이름을 특별히 주목하고 그 이름을 택한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조짐이었다. "그는 내 신 벨의 이름을 쫓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이다." 그는 다니엘의 드문 재능을 칭찬한다.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지라" 고 왕은 그의 면전에서 얘기한다(9절). 우리는 그가 이런 찬사를 듣고 으시대긴 커녕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느부갓네살의 쓰레기 같은 잡신에게로 돌려진다는 데 비애를 느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에게는 이상한 잡물이 섞여있다. 하나님께 대한 찬사가 금방 잡신에게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확신과 배치되는 타락에 동조하는 자들에게서 보통 발견된다.


1. 왕은 우상 숭배의 언어와 방언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로 전향한 자가 아니다. 그는 우상 숭배자이며 이것은 그의 말에 누설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신들 운운하며 하나의 신을 충분히 여겨 묵묵히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전능하신 한 분께 따르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왕이 거룩한 신들의 영이라고 말할 때는 악신도 있고 선신도 있으며 사람들이 악신을 섬기는 것은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다니엘은 선하고 자혜로운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유의 주시라는 것을 재삼 재사 인정했으면서(2:47; 3:29) 여기서는 벨이 여전히 자기 신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또 다시 다니엘을 칭찬하는데 그 칭찬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박수장으로서 대접하고 있다. 그는 그 지식이 본질상이나 정도에 있어서도 박수들의 지시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느부갓네살이 우상 숭배와 얼마나 밀접했던가를 살펴보자. 그는 다신관(多神觀)을 가지고 있었고 벨을 자기 신으로 택했다. 그는 이 두 가지의 불합리성이 논박의 여지가 없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다른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신들이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렘 2:11). 많은 사람들이 체면상 자기 길을 떠나지 못한다고 생가하나 그 때문에 그릇된 길을 고집한다. 느부갓네살의 각성은 얼마나 이완되고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얼마나 쉽사리 저버리는지 주목하자. 그는 한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든 신들의 신이시라고 부렀다(2:47). 그런데 이제는 거룩한 신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동렬로 취급한다. 그것이 신속히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순식간에 망각하고 사라져 버린다는 데 주목하자. 느부갓네살은 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기에 곧 뒷걸음질쳐서 거짓 신들께 대한 이전의 존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2. 왕은 다니엘에게 대한 큰 평가를 표현한다.

그는 다니엘이 참신의 종 오직 하나님만의 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다니엘을 자기 술객들이 갖지 못한 통찰력과 예견력을 가진 자로 간주한다.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라." 예언의 영은 원수들이 판단해도 점술의 영보다 능가한다는 데 주목하자.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기술에 대한 공정한 시합에 따라 얻어진 판정이었다.



느부갓네살의 꿈의 내용


느부갓네살은 자기 꿈을 상세히 서술한다.


1. 느부갓네살이 본 장엄한 나무

그는 숲 속의 모든 나무보다 빼어나게 무성하고 장엄한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땅의 중앙에 있었다. 그것은 바벨론의 통치자 느부갓네살을 표현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당시 세계의 중앙에 있었던 때문이다. 모든 인방 군주를 압도하는 그의 위엄과 혁혁함은 심히 높은 이 나무의 높이로 상징되었다. 그 나무는 하늘에 닿았다. 그는 자기 주변 사람들보다 더 높았고 따라서 신적 존귀를 받으려고 의도하였다. 아니, 그는 주변 사람들을 힘으로 압도했다. 그가 거느린 강력한 군대는 파죽지세로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그러므로 그의 막강한 군대는 이 나무의 견고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점점 커지는 그의 유세는 열방의 화제꺼리가 되고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기에(어떤 이는 시기의 눈으로 봤고 어떤 이는 경이에 찬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이 나무의 모습은 땅 끝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이 나무는 보기 좋고 먹기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갖고 있었다(12절). 그 아름다운 잎사귀는 느부갓네살의 화려하고 웅장한 궁정을 의미한다. 그의 궁정은 나그네들의 경탄과 그 나라 백성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 나무는 보기에 장관을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용도도 매우 컸다.

(1) 보호에 이용된다. 그 가지는 짐승과 새들의 피난처가 된다. 통치자는 그 백성에게 더위와 풍우를 피하게 하는 피난처가 되어야 하며(사 4:6) 그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위험을 당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지 궁리해야 한다. 가시나무는 자기를 나무들 위에 군림하게 한다면 그들더러 와서 자기 그늘에 피하게 하겠다고 청한다(삿 9:15). 충성을 유도하는 것은 곧 보호이다. 세상의 군왕은 그 백성에게 마치 큰 나무의 그늘과 같다(삿 32:2). 아니 바위는 견고하긴 하나 차갑기 때문에 그들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인다고 한다(시 17:8). 그 날개 아래는 안전한 뿐만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다.

(2) 양식을 얻는 데도 사용된다. 앗수르인은 백향목으로 비유되었다(겔 31:6). 백향목은 그늘만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본문의 나무는 열매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 열매는 많아서 만인의 식물이 될 만하고 무릇 혈기있는 자는 거기서 식물을 얻었다." 이 강대한 나라는 광대했을 뿐만 아니라 선을 베풀기도 했을 것 같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고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자기 힘과 세력을 이용하여 부와 교역을 가져왔다. 권세를 행하는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눅 22:25). 권세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참으로 은혜를 베푸는 은인이 되는 것이다. 권세자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곧 많은 사람의 의지가 되고 그들을 부양시키는 것이다. 재물이 많아지면 먹는 자도 많아진다.


2. 장엄한 나무에 대한 소리

느부갓네살은 이 나무의 파멸에 대해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그것을 완전히 기억했다가 여기에 술회하고 있는데 그는 아마 들은 대로 축어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리라. 이 편결은 천사가 전했다. 그는 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이 판결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을 들었다. 이 천사는 여기서 순찰자 또는 감시자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천사들이 그 본질상 영이기에 졸지도 자지도 않을 뿐더러 그 직분상 영들을 섬기며 끊임없이 보살피고 위대하신 주인을 섬길 온갖 기회를 살피기도 하는 때문이다. 그들은 순찰자로서 하나님의 경외자들 주위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출하여 자기 수중에 굳게 붙잡는다. 이 천사는 사자였으며 거룩한 자였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집에 합당하다(시 93:5). 그러므로 하나님께 고용되어 그를 수종하는 자는 거룩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성품의 순결과 정직성을 보존하여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여기서 이 나무에 선고된 파멸을 검토해 보자.

(1) 나무를 벌채하라는 명령이 나온다(14절). 도끼가 이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아무리 높고 아무리 견고한 나무라도 멸망의 날이 올 때에는 안전할 수가 없다. 그 나무를 피난처로 삼던 짐승들과 새들은 쫓겨나 흩어지게 된다. 나뭇가지는 절단되고 잎은 우수수 떨어지며 열매는 흩어진다. 세상의 번영은 절정시에라도 불확실한 것임을 주목하자. 극히 화려한 가운데서 최대의 권세를 과시하던 자들이 자기가 신뢰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일은 비일비재이다. 섭리가 바뀌면 걸출하던 자들이 포로가 되고 자기 분수 이상으로 풍족하게 살던 자들이 궁핍하게 되며 한때 식객과 간청자를 많이 두던 자들이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집에 심겨 그에게 열매를 맺는 의로운 나무(시 92:13)는 결코 벌목되거나 잎이 시들지 않을 것이다.

(2) 뿌리는 보존되도록 하라는 배려가 베풀어진다(15절).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어 온갖 일기에 노출되게 하리라. 거기서 돌보아 주는 자없이 풀 속에 파묻혀 잇게 하라. 이전에는 그 가지 아래 피신하던 짐승들이 이제는 그 그루터기 위에서 휴식하게 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갈가리 찢기지 않고 오물처럼 짓밟히지 않으며 그것이 아직 더 좋은 날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철과 놋줄로 테두리를 돌려 견고하게 하리라." 심판 중의 하나님께서 자비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데 주목하자. 그 형편이 극히 사면초가인 것처럼 보이는 고독자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들을 예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나무는 소망이 있으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며 물기운에 움이 돋는다(욥 14:7-9).

(3) 천사는 직접 그 의미를 느부갓네살에게 설명한다(16절). 이 나무가 뜻하는 인물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는 존귀와 국가와 인간의 존엄을 박탈당하며 이성의 사용을 빼앗겨 짐승처럼 일곱 때를 지나게 되리라고 선고받는다. "그는 짐승의 마음을 받으리라." 이것은 현세적 심판 중에서 가장 슬프고 쓰라린 심판이다. 이것은 차라리 죽은 것보다 천 배나 더 나쁘다 비록 당사자는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두려운 저주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과하시려는 외적 고난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고난을 끈기있게 참으며 이성의 사용과 양심의 평화를 계속 허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처럼 높이는 교만한 폭군들(겔 28:22)은 인간의 마음을 박탈당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땅하다.

(4) 이 일은 사실성이 확증되고 있다(17절)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으로서 이 일을 결정하셨다. 그는 이 칙령에 서명을 하셨다.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준하여 명령이 발해졌다.

[1] 하늘의 천사들이 이를 입증하고 시인하고 갈채를 보냄으로써 동의하였다. 이 일은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천사의 권면이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계획의 실현에 천사들의 사역을 이용하시듯이 때로는 사람들 모양으로 마치 천사들과 상의라도 하시는 것처럼 묘사된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사 6:8). "누가 아합을 꾀겠느냐?" (왕상 22:20) 마찬가지로 본문은 이 판결의 엄숙성을 의미한다. 왕의 어명 또는 비답은 este me ipso-즉 집의 앞에서라는 말로 되어 있지만 헌장 따위는 "이름을 부서(副署)한 우리들 앞에서" 란 말로 되어 있다. 느부갓네살의 운명도 그와 같이 순찰자들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2]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을 탄원했다. "이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다." 느부갓네살의 무거운 멍에 아래서 신음하던 하나님의 고난받던 백성들은 하나님께 복수를 해 주시도록 부르짖었다. 그들은 요청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대답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압제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그가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2:27). 아합 때에도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대해 탄원하자 그의 말대로 우로가 없으리라는 판결이 내려 졌던 것이다(왕상 17:1).

(5) 그 의도가 선언되고 있다. 이 나무의 벌채 명령이 하달된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생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심판이 집행되어야 하는 것은 생각과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지배하시는 신이시다. 그는 세상 속에 자기 나라를 소유하고 계시며 그 나라의 사무를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대해서 소유하는 바로 그 주권으로 인간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 높이는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시 75:6, 7). 하나님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던 자를 권좌에까지 높이시며 야망에 불타는 자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신다. 때때로 그는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고 그들로 자기 목적에 봉사시키신다. 그는 양떼 속에 있는 다윗을 세우셨듯이 보 잘 것 없는 자들을 세우신다. 그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다(시 113:7, 8). 아니, 때로는 악한 자를 세우셔서 패역한 백성에게 채찍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실 수 있으시며 행하실지도 모르며 때로는 이렇게 행하시면서 자기 일을 조금도 설명치 않으신다. 느부갓네살을 낮추심은 인생들로 이 일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응보의 세계 곧 영들의 세계로 이미 가 있는 자들은 이것을 안다. 죽은 자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다스리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산 자는 너무 늦기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이것들을 알게 되어야 하며 명심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보고들은 꿈을 완전히 그리고 신실하게 말한 뒤 다니엘에게 그 해석을 요구한다. 그는 다니엘외에 이 일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니엘이라면 이 일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거룩한 신들 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거룩한 하나님이란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적합한 칭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안에 두고 있는 자들에게는 많은 것이 기대된다. 느부갓네살이 그 나무가 바로 자신의 파멸을 뜻한다고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그는 허영심에 차서 그것이 자기와 적수 관계에 있는 다른 군주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꿈에서 받은 것이 자기 적수의 파멸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전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간에 그는 그 꿈의 의미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났으며 다니엘에게 그 꿈의 해석을 의존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체적 심판의 경고를 주실 때 우리는 그의 의사를 이해하고 싶어해야 하며 성에서 부르짖는 주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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