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이 아닌 '데라'의 계보로 시작되는가?: 창세기 톨레도트(תּוֹלְדוֹת) 구조의 비밀
왜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이 아닌 '데라'의 계보로 시작되는가?: 창세기 톨레도트(תּוֹלְדוֹת) 구조의 비밀
목차
- 서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뒤에 숨겨진 이름, 데라
- 본론 1: 창세기를 여는 열쇠, '톨레도트(Toledot)'의 비밀과 P.J. 와이즈맨의 가설
- 본론 2: 계보의 문학적 기능: '데라의 계보'가 아브라함을 말하는 이유
- 본론 3: 은혜의 신학: 우상숭배자의 계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
- 결론: 인간의 실패를 덮고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
서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뒤에 숨겨진 이름, 데라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독자라면 창세기 11장 27절에서 마주하는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는 구절 앞에서 잠시 멈칫하게 됩니다. 이후 전개되는 거대한 구속사의 주인공은 분명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며 그의 생애를 묵상하지만, 정작 성경은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공식적인 표제어로 그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더욱이 데라는 여호수아 24장 2절이 증언하듯, 강 저쪽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던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왜 성경은 은혜의 본이 되지 못하는 인물의 이름을 빌려 거룩한 구속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명칭의 문제를 넘어,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은혜'의 본질을 탐구하는 중요한 신학적 화두를 던집니다. 본고에서는 창세기의 독특한 구조적 특징인 '톨레도트'의 분석을 통해 이 난제를 해결하고, 그 속에 담긴 깊은 섭리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본론 1: 창세기를 여는 열쇠, '톨레도트(Toledot)'의 비밀과 P.J. 와이즈맨의 가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히브리어 '톨레도트(תּוֹלְדוֹת)'라는 단어의 기능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계보', '족보', '대략' 등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창세기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골격입니다. 창세기에는 이 톨레도트가 총 11회(창 2:4; 5:1; 6:9; 10:1; 11:10; 11:27; 25:12, 19; 36:1; 36:9; 37:2) 등장하며, 이는 창세기의 내용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표지 역할을 합니다.
이 톨레도트의 성격에 대해 고고학자 P.J. 와이즈맨(P.J. Wiseman)은 매우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고대 근동의 점토판 기록 습관을 근거로, 톨레도트를 해당 이야기의 시작이 아닌 '끝'을 알리는 판권장(colophon)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마치 현대 서적의 판권 페이지가 책의 마지막에 위치하여 저자와 출판 정보를 제공하듯, "이것이 ~의 톨레도트(내력)이다"라는 문구가 앞선 이야기의 결론이자 서명이라는 것입니다. 와이즈맨의 이론에 따르면 창세기는 모세가 직접 모든 것을 처음부터 쓴 것이 아니라,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11개의 점토판 기록을 집대성한 역사적 기록물이 됩니다. 이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변증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 즉 요셉의 긴 이야기를 마치는 부분에 해당하는 톨레도트가 부재한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따라서 현대 주류 구약학계는 와이즈맨의 통찰을 존중하되, 톨레도트를 단순한 결문이 아닌, 새로운 단락을 도입하는 '표제어'로서의 기능에 더 무게를 둡니다.
본론 2: 계보의 문학적 기능: '데라의 계보'가 아브라함을 말하는 이유
'톨레도트'는 어원적으로 '낳다'를 뜻하는 동사 '얄라드(יָלַד)'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조상을 나열하는 족보(pedigree)가 아니라, 그 인물로부터 파생된 '후손들의 역사(history of descendants)'를 의미합니다. 즉, "A의 톨레도트"라는 표제어는 A의 과거를 다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A가 낳은 자손들이 펼쳐갈 미래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창세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원칙은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이삭의 계보(창 25:19)'는 이삭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아들 야곱과 에서의 갈등을 다루며, '야곱의 계보(창 37:2)'는 야곱 자신이 아닌 그의 아들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기록합니다. 같은 논리로 '데라의 계보(창 11:27)'는 데라의 일대기가 아닌, 데라가 낳은 아들 아브라함과 나홀, 그리고 하란의 아들 롯의 이야기를 전개하겠다는 문학적 신호입니다.
만약 성경이 이를 '아브라함의 계보'라고 명명했다면, 문맥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의 이야기가 바로 이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소명과 여정, 그리고 롯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공통 조상인 '데라'를 표제어로 세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개인을 영웅시하기보다, 한 가문을 택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데라는 비록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자였으나, 하나님은 그 척박한 뿌리에서 '믿음'이라는 가지를 뻗어 올리시기 위해 그를 족보의 머릿돌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본론 3: 은혜의 신학: 우상숭배자의 계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
우리는 흔히 성경 인물에게서 도덕적 모범을 찾으려 하지만, '데라의 계보'라는 명칭은 구원이 인간의 자격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대로 데라는 은혜의 본이 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자격 없는 자'의 이름을 구속사의 중요한 분기점에 기록함으로써, 은혜의 주체가 철저히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로마서 4장과 여호수아 24장은 아브라함 역시 부름받기 전에는 아버지 데라와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데라와 달리 태생적으로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데라의 계보'라는 제목은 아브라함의 뿌리가 거룩한 땅이 아닌, 죄와 우상의 땅에 깊이 박혀 있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창세기가 보여주는 일관된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의 후예가 문명을 발전시키게 두셨고, 속이는 자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상을 깎아 팔던 데라의 가문에서 열방을 축복할 믿음의 씨앗을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데라의 계보'는 인간의 어두운 배경조차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은혜를 드러내는 표지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인간의 실패를 덮고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
결론적으로 창세기 11장의 '데라의 계보'라는 표제는 문학적 필연성이자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문학적으로는 톨레도트 구조에 따라 데라의 후손인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적절한 장치이며,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인물의 위대함에 매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데라'라는 불완전한 이름 아래 위대한 믿음의 여정을 숨겨두었습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데라와 같은 집안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데라의 계보'는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배경이 데라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해 써 내려가실 하나님의 '다음 톨레도트'는 여전히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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