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는 우리 모든 인생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수고와 기쁨, 일시적인 성공과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 준비를 위하여, 전도서의 서론인 1장 1절부터 3절까지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전도서 1장 1절-3절, 전도서의 목적과 의도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이 책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 된 자는 솔로몬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화평하다"는 뜻의 자기 이름 솔로몬을 감추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죄악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 나라에 환란을 초래하였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으며 자기 양심의 평안을 상실하여서, 그 이상 더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솔로몬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고 불러라. "보라. 내게 화평함 대신 큰 괴로움을 취하였노라." 그는 자기 자신을 다음 세 가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1. 전도자
이것은 그의 현재적 특성을 시사해 주는 칭호이다. 그는 코헬렛(Koheleth, קהלת)입니다. 이것은 "거두어 들인다"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이 말은 여성 어미(語尾)로 되어 있는데, 아마 솔로몬은 자신의 아녀자 같은 유약성을 자책할 심산으로 이 같은 여성 어미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타락은 딴 어떤 요인보다 바로 이 유약함에서 크게 야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상을 세운 것은 자기 아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다(느 13:26).
2.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과 같이 선한 인간의 아들됨을 크나 큰 영광으로 간주하였고, 이 이름을 매우 귀하게 여겼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런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기가 지은 죄를 더 중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자기 부친은 자기를 위해 좋은 교육을 베풀어 주었으며 많은 선한 기도를 쉬지 않았으나 자신은 다윗과 같은 자의 이름과 가문에 먹칠을 하고 치욕을 돌린 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하였을 것입니다.
3. 예루살렘 왕
이 이름은 그의 죄를 아주 중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많은 일을 베푸셨으며, 자기를 왕좌에까지 나아가도록 높여 주셨건만 그는 너무나 형편없이 그에게 갚음을 하였습니다. 또, 이 이름은 자기가 기록한 것에 이득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갈데아 주석서(이 책에는 매우 광범위한 추가 기사나 상세한 주해를 성서 원문 도처에 달고 있다)는 솔로몬이 이 책을 저술한 데 대한 기술을 함에 있어서, 솔로몬은 예언의 영에 의하여 이스라엘 열 지파가 자기 아들에게서 반역하는 것을 미리 내다 보았으며, 시간이 경과하여 예루살렘의 함락과 지성소의 파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됨까지도 예견하여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란 말을 하였다고 풀이하였습니다.
전도서의 일반적 목적과 의도
1. "모든 것이 헛되다"(2절)
그가 기록해 놓고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명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문귀가 아닙니다. 다윗도 한 두 번 같은 취지를 말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장되고 있는 진리 그 자체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뜻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세속적인 일과 향락,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요 12:16), 현재 상태에서 우리의 감각과 기호에 즐거운 모든 것, 곧 우리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거나 타인들에게 명성을 얻어 주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2. 세상의 것은 충분하지 않다(8절)
세상의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도록 만들어 주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취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8절)
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 "수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염려와 애씀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 일에는 항구적인 피로가 존재하는데, "해 아래서 행하는 수고"입니다. 이 수고를 마치기 위해서는, 깜깜하고 차가운 무덤 속에 가야만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또, 그 일의 이익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모든 수고로 무슨 유익을 얻는가?" 솔로몬은 잠언에서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고(잠 14:23)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모든 수고에 어떤 유익함도 없다고 부인합니다. 우리는 "우리 손이 수고한 바"를 먹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익을 주고 행복을 주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우리의 신체와 생명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의 모든 수고로 무슨 유익을 얻는가?" "인간의 생명은 그 소유의 풍부함에 있지 아니하다"(눅 12:15). 재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재물에 대한 근심도 늘어나며 "그 재물을 먹는 자도 많아지고", 하찮은 일이 그 재물이 주는 모든 위안을 씁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 영혼과 장차 올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층 더 정당하게 "사람이 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 영혼을 부유하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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