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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2장의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과 다니엘의 신상 해석

다니엘 2장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꾼 신상의 내용이 나옵니다. 왕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신상의 모습과 그 상징들을 해석합니다. 다니엘의 신상 해석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2장의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과 다니엘의 신상 해석



다니엘 2장의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과 다니엘의 신상 해석



금 머리 : 바벨론(신바빌로니아, Neo-Babylonia) : 605∼539 B.C.


금은 바벨론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금속이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금잔”으로 묘사하였다(렘 51:7). 헤로도투스는 신상, 왕이 앉은 보좌, 상과 제단 모두가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아낌없는 찬사로 바벨론을 묘사한다(Herodotus i. 181, 183, iii. 1-7). 플리니우스(Pliny)는 제사장들의 예복을 금으로 섞어 짠 것으로 언급한다.

느부갓네살은 고대의 왕들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다음의 명각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자기 후계자에게 거대하고 부유한 왕국을 남겼다.

“위 바다[부터] 아래 바다[까지] (한 줄이 파손되었음) … 나의 주(主) 마르둑이 내게 위탁한 것, 나는 바벨론 도성을 모든 나라들과 모든 인간의 거주지 중에 최고로 만들었다. … 나는 그 이름을 거룩한 도성들 가운데 [가장] 찬양[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또는 높였다]. … 항상 … 현명한 (통치자와 같은) … 나의 주 느보와 마르둑의 신전들 … .나의 나부 마르둑은 하늘과 땅의 통치자의 왕궁을 위해 적절한 장식을 [원했다], 외국의 적이 (그것을) 통치하고 (그것의) 부를 도적질하고 있는 (이 레바논)-그것의 백성은 흩어졌고 먼 (지역으로) 도망했다. 나의 주 느보와 마르둑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나는 레바논까지 가는 하나[의] [원정을] 위해 [내 군대를] 조직했다. 나는 어디서나 그것의 적을 근절하여 그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것의 모든 흩어진 거민들을 나는 그들의 정착지로 다시 인도해 들였다. 이전의 왕이 행하지 않은 것을 (나는 성취했다). 나는 가파른 산맥을 관통했고 바위를 쪼갰으며 길을 내었고 (따라서) 백향목(의 운반을) 위해 곧은 길을 만들었다. 나는 아라투(Arahtu)를 띄[워] (내려) 마르둑에게 가져왔다, 나의 왕, 강력한 백향목들, 높고 강하고, 사랑스러운 아름다움과 우수한 짙은 색의 품질, 레바논의 그 풍성한 산물, (마치 그들이) 강으로 (운반되는) 갈대 줄기들인 양. 바벨론 안에 뽕나무를 [나는 비축하였다]. 나는 레바논의 거민들을 서로 안전하게 살게 했으며 아무도 그들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했다. [그들에게] 아무도 어떤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나는 나를 영원한 왕(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석비를 [그곳에 세]웠다” (Ancient Near Eastern Texts, 307).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영원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비를 다했다. 현대 고고학에 의해 밝혀진 대로 안쪽은 두께가 약 3.6 미터가 되는 벽과, 바깥쪽은 두께가 약 6.6 미터나 되는 내성가(內城街)를 두른 이중 성벽도 불안하여 또 다시 그 바깥 외각을 다시 쌓았는데, 이것도 이중 성벽으로 두께가 각각 7.2-7.8 미터나 되어 사중(四重) 성벽으로 두른 셈이었다. 게다가 내성가와 서쪽의 신성가(新城街) 주변은 유프라테스의 강물을 이용하여 해자(垓字)를 둘러 파서 외부로부터의 접근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도면밀한 느부갓네살의 황금의 꿈도 그 후 70년이 못되는 B.C. 539년에 메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은 가슴, 두 팔 : 메대 바사(Medo-Persia) : 539∼331 B.C.


둘째 왕국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국으로 시작되었으므로, 메대 바사 왕국이라고 불린다. 그 나라에는 더 오래된 메대 왕국과, 나중에 바사를 정복한 고레스가 손에 넣은 지역이 포함되었다. 어떤 이들은 메대가 두 번째 나라이고 바사가 세 번째 나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메대 왕국은 바벨론 왕국과 동시대의 왕국이었으며 그 계승자는 아니었다. 메대는 바벨론이 함락된 것보다 먼저 고레스에 의해 함락되었다. 다니엘서에는 바벨론을 이은 나라는 메대와 바사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단 5:28, 6:8, 8:20).

메대와 바사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B.C. 2000년경에 마대(메대)가 이끄는 몇몇 아리안족(Aryan)이 지금의 남러시아로부터 후에 북바사가 된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9세기에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이 아리안족 가운데는 바사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B.C. 9세기 후반에 엘람에 접경한 자그로스(Zagros) 산맥에 정착했으며, 아마도 675년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통치자가 안산(Anshan) 도성의 왕으로 자리를 잡았다.

B.C. 553-550년에 메대 왕국의 봉신으로 바사의 왕이 된 고레스가 종주국의 왕이요 외조부이기도 한 메대의 아스튀아게스(Astyages) 왕에게 반역하여 나라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예속되었던 바사가 메대 왕국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바사는 고레스 이후로 통치 세력이 되었으므로 그 때부터는 일반적으로 바사 왕국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메대의 옛 명성은 다니엘 시대에 바벨론을 정복한 자들과 그 이후까지 적용된 “메대와 바사”라는 어구에 반영되어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기 백수십 년 전에 고레스의 일을 예언하였다(사 45:1). 고레스는 B.C. 547년에 부유한 리디아의 크뢰수스(Croesus)를 쳐부수고, B.C. 539년에는 특별한 전략을 써서 바벨론을 손에 넣었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그 모든 왕국을 주었음을 인정하였다(대하 36:23, 라 1:2).

이 메대의 정복자는 곧 이웃 종족들을 쳐부수고 북쪽으로는 아라랏에서 남동쪽으로는 바벨론,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만까지 통치하였다. 바사의 국력은 최초로 은(銀)을 화폐의 단위로 사용하여 이룬 징세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셈족어(히브리어도 셈족어에 속함)로 “돈”을 의미하는 ‘케세프’는 “은(silver)”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단 11:2에 예언된 바사의 넷째 왕은 부왕(父王)에게서 물려받은 엄청난 은으로 심히 부요하게 된다(단 11:2). 그러나 은 나라인 바사의 영광도 200 년 후에 헬라 왕국에 의해 진토에 묻히고 만다.



놋 배와 넓적다리 : 헬라(그리스, Greece) : 331∼168 B.C.


‘헬라’의 히브리어는 ‘야완’으로 그것은 노아의 아들인 야벳의 아들들 가운데 한 아들의 이름이다(창 10:2).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즈음 후일에 헬라로 불린 이 인도-유럽족이 이전의 지중해 거민들을 정복하거나 몰아내면서 에게 지역(헬라 본토, 섬들 그리고 소아시아의 서안)으로 연속적인 파도처럼 이주해 들어오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여 입증된 자료에 따르면 이오니아 헬라인은 프삼티코스 I세(Psamtik I, B.C. 663-609) 당시 애굽에서, 느부갓네살 통치 기간 중에 바벨론에서 발견되었다.

헬라는 공통 언어를 가졌으나 일치된 행동은 거의 하지 않은 작은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고대 헬라는 주로 B.C. 5세기에 아덴이 주도하여 꽃피운 헬라 문명의 황금기를 가리킨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헬라”는, 고전 시대의 헬라의 나뉜 도시 국가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바사를 정복한 마게도냐 왕국을 언급한다. 헬라 본토의 북쪽에 위치한 혈연 국가 마게도냐는 헬라 도시들을 정복하여 처음으로 그것들을 강한 연합 국가로 합병하였다. 헬라-마게도냐를 확장한 아버지로부터 왕국을 물려받은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재위 336∼323 B.C. )은 마게도냐 왕국과 헬라 문화를 동쪽으로 확장시키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바사 왕국을 정복하였다. 바사 왕국을 마지막으로 통치한 왕은 다리오 III세(Codomannus)였는데 그는 그라니쿠스(Granicus, B.C. 334), 잇수스(Issus, B.C. 333) 그리고 아르벨라(Arbela) 즉 가우가멜라(Gaugamela, B.C. 331)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했다.



쇠 종아리 : 로마(Rome) : 168 B.C. ∼476 A.D.


알렉산드로스의 마게도냐 제국이 분열되어 남은 나라들을 계승한 왕국은 로마였다.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기본(Edward Gibbons)은 로마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하였다. 기본은 로마를 “철의 제국”이라고 칭하였다.

“공화국의 군대는 전투에서는 종종 진 적이 있었지만,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리하면서 유프라테스 강과 다뉴브 강, 라인 강과 대양을 향하여 빠르게 진군하여, 그 나라들과 왕들을 나타내는 금과 은과 놋의 우상들은 철의 제국 로마2에 의하여 연속적으로 깨어졌다.” (Edward Gibbons,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vol. II, ch. 38, 634)

초기의 로마는 전통적 연대인 B.C. 753년보다 오래 전, 다른 동족의 인도-유럽족들이 헬라에 정착했을 당시에 파상적으로 이탈리아에 들어온 라틴족에 의해 정착되었다. 8세기부터 5세기에 이 라틴 도시 국가는 이웃의 에트루리아(Etruscan)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로마의 문명은 10세기에 이탈리아에 온 에트루리아인들, 특히 2세기 후에 도착한 헬라인들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B.C. 500년경 로마 정부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500년 가까이 공화국으로 남아 있었다. B.C. 265년에 전(全) 이탈리아가 로마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B.C. 200년에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강력한 적수인 카르타고(Carthage, 본래는 베니게 식민지)와의 필사적인 투쟁에서 승리자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로마는 서지중해의 여왕이었으며, 그 때까지는 동쪽의 국가들을 장악하지 못했으나 그들 중의 어떤 국가보다도 더 강했다.

그 이후에 로마는 우선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의 세 왕국을 합병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잇는 위대한 세계적 세력이 되었다. B.C. 168년 6월 22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고국 마게도냐의 마지막 지역이 로마의 철각에 짓밟혀 멸망함으로써 세계는 철의 제국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네 번째 왕국은 2세기 기독교 시대에는 영국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르렀던, 네 나라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했고 가장 광대했던 나라였다.



쇠와 진흙이 섞인 발과 발가락 : 열국(列國)시대 : 476∼재림


서기 351년 게르만 족의 한 부족인 알레마니가 로마 영토에 첫 발을 디딘 후, 395년 데오도시우스 대제(Theodosius the Great)의 사망과 함께 로마는 동서로 나누이고, 476년 헤룰리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기까지 약 120 여년 동안 로마제국은 철의 강도를 잃고 대략 아래와 같이 쪼개졌다. 이들 나라들이 오늘날의 서구 세계의 근간이 되고 있다.


1. 연대, 게르만족의 부족 이름, 지금의 나라 혹은 지방 순.

  • 351년, 알레마니(Alemmanni), 독일.
  • 351, 프랑크(Franks), 프랑스.
  • 406, 부르군디(Burgundians), 스위스.
  • 406, 수에비(Suevi), 포르투갈.
  • 406, 반달(Vandals), 아프리카.
  • 408, 서고트(Visigoths), 스페인.
  • 409, 앵글로-섹슨(Anglo-Saxons), 영국.
  • 453, 동고트(Ostrogoths), 이탈리아.
  • 453, 롬바르드(Lombards), 이탈리아.
  • 476, 헤룰리(Heruli), 이탈리아,


2. 모든 연합은 실패할 것이다.

“전쟁 중에 있는 유럽은 거의 큰 가족 싸움 같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전쟁에 가장 열렬히 참여한 나라의 왕실은 실제로 동일한 게르만족 계통으로 거의 모두가 한 혈통이었다. 두 작은 왕국인 세르비아와 몬테니그로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모든 왕위가 게르만의 혈통이 지배하는 왕실 사이의 상호 결혼으로 이루어져 왔다. … 북 유럽을 지배하는 왕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긴밀한 관계가 맺어졌다. 즉 영국과 러시아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윌리암 황제는 그의 사촌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국왕 죠지 5세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찬 9세의 딸들인 그들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사촌 간이다. 독일의 윌리암 2세는 영국의 국왕 죠지 5세의 사촌인데 이는 윌리암 황제의 어머니 빅토리아가 죠지 왕의 아버지인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와 남매 간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러시아의 니콜라스 황제는 죠지 왕과 윌리암 황제 모두에게 사촌 벌이 되는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황후의 어머니는 에드워드 7세의 또 다른 누이였다. 결과적으로 죠지 왕, 윌리암 황제, 니콜라스 황제는 그들의 아버지를 통하여 1752년에 죽은 멕클렌버그 스트렐리쯔 공과 촬스의 증손자가 되고 윌리암 황제와 니콜라스 황제는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윌리암 3세의 자손들이다. 죠지 왕과 니콜라스 황제의 다른 사촌들이면서 덴마크의 크리스찬 9세의 손자들도 되는 사람들은 덴마크의 크리스찬 10세, 그리스의 콘스탄티누스 1세, 그리고 윌리암 2세의 사위가 되는 브룬스윅의 공작 에른스트 어거스트 등이다.” (George H. Merritt, “The Royal Relatives of Europe”, World Work, Oct. 1914)

이러한 긴밀한 혼인관계와 혈연관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예언은,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는 것처럼 그대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류를 연합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망상에 불과하며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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