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4장 28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은, 왕이 꾸고 다니엘이 해석한 대로 꿈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왕은 일종의 정신병에 걸려서 바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매일성경큐티를 위한 자료와 새벽설교를 위한 자료인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4장 28절-33절, 짐승 가운데로 쫓겨난 느부갓네살
우리는 여기서 느부갓네살의 꿈이 성취되고 다니엘의 해몽이 정당화되며 확증받는 것을 보게 된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기뻐했는지 싫어했는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인내.
"이 모든 일이 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절).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죄를 회개하거나, 가난한 포로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 같다. 그의 평안함은 그 동안뿐이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이 "사로잡힌 자들을 그 집으로 놓아보내지 않은 것" 은 여전히 하나님과 쟁정이었기 때문이었다(사 14:17). 다니엘은 그에게 회개할 것을 충고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신실하시므로 그는 왕에게 1년의 여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벧후 3:9).
느부갓네살의 오만불손함.
왕은 오만불손하여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했다. 느부갓네살은 호화로운 바벨론의 왕궁에서 거닐었다. 그는 모든 속령과 함께 자기의 명령 하에 있는 광대한 도성의 전경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교만하게 거닐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로 했거나 또는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마 그는 모모한 외국인들에게 자기 왕국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바벨론은 크지 않은가?" 그렇다 그 성은 대단히 방대해서 성안에서 45마일을 걸을 만큼 넓었다. 성안에는 사람들이 넘쳤고, 그들은 모두 부유했다. 그 도시는 황금의 도시였고 그것의 위대성을 외쳐도 손색이 없었다(사 14:4). 집들과 성벽과 망대와 공공기관의 건물들은 굉장했다. 바벨론에 있는 모든 것은 위대하게 보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바벨론은 내가 건설하였다" 고 그는 말한다. 바벨론은 그가 태어나기 수세기 전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을 강화시키고 미화시킨 것은 느부갓네살이었다. 우리는 바벨론의 대부분이 그의 오랜 통치 기간 중 재건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은 마치 시이저가 로마에 대해서 Lateritiam inveni, marmoream reliqui - 즉 나는 벽돌을 발견했지만 그것으로 대리석을 남겼다 라고 자랑했던 것처럼, 바벨론을 건축한 것을 자랑한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바벨론을 건설하여 왕국의 집즉 제국의 수도로 삼은 것을 자랑한다(원문에는 :왕국의 집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음 :역주). 그의 지배권에 속한 열방과 비교할 때 이 광활한 도시는, 단지 하나의 집에 불과했었다. 그는 바벨론을 그의 백성들의 도움으로 건설했으나, 그는 자기 능력과 권세로 건설했다고 자랑한다. 그는 자기 편리와 안전을 위해서 바벨론을 건설했는데, 마치 그럴 필요성이 없었던 것처럼 순전히 자기 위엄하여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건설했노라고 자랑한다. 교만과 자만심은 세상에서 큰 일을 이룩하는 위대한 자들을 극히 쉽사리 엄습하는 죄라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이 취하기 쉽다.
느부갓네살의 교만함.
왕의 교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느부갓네살은 그와 같이 우쭐거리며 걷고, 자랑하면서 자기 그림자를 경배하고 있었다. 왕의 입에 거만한 말이 있을 때, 하늘로부터 능력있는 말씀이 나아왔다. 그 능력있는 말씀에 의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박탈당한다.
1. 왕으로서의 명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느부갓네살이 자기 왕국의 보호를 위해 난공불락의 성채를 세웠다고 생각한 순간 그 왕국은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가 그 성은 난공불락의 성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그로부터 빼앗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때 그 왕국은 저절로 떠나가고 있다. 물론 그가 그 왕국을 전적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되자 곧 왕국은 그의 수중에서 떠나간 것이다.
2. 그는 인간으로서의 명예도 박탈당했다.
그는 그의 이성을 잃었고, 바로 그 이유로 자기 지배권도 상실했다. "그들은 너를 사람들로부터 쫓아낼 것이다" (32절). 그리고 그것은 성취되었다(33절). 그는 같은 시간에 쫓겨난 것이다. 갑자기 그는 미치게 되었다. 그의 이해력과 기억은 사라져 버렸고, 이성적인 영혼의 기능은 파괴되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야만적인 동물이 된 것이다. 그는 벌거벗었고, 스스로 이성적인 피조물의 사회에서 피하여 숲과 나무 사이를 광포하게 뛰어 다녔다. 그는 자신의 종들에게 쫓겨났다. 그의 신복들은 그의 이성 회복을 가망없다고 보고 포기했으며 그를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그는 (백수의 왕 사자처럼) 야수의 정신을 갖지 않고 비천한 동물의 정신을 가졌다. 그는 소처럼 풀을 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고 소처럼 울었을 것이다. 혹자는 그의 몸전체가 머리털로 뒤덮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두발과 수염은 깎거나 빗질하지 않았으므로 독수리 털처럼 되었고, 그의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다. 여기서 잠깐 쉬면서 이 비극적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리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하자.
(1)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를 보자. 그리고 우리가 이성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하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나 이성을 잃은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살피자. 우리는 여기서 어성의 존중을 배우고 우울증이나 정신 분열증이나 환각 증세에 빠진 자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정신 이상자를 능멸하지 말고 온정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따뜻이 맞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 공동의 적이자 시련이다. 이제나 저제나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여기서 인간의 영광과 위대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살피자. 이것이 위대한 느부갓네살 대왕인가? 이 비참한 동물은 가난한 거지보다 더 초라하지 않은가? 이것이 왕좌에서는 그토록 영화롭게 보이고 군진에서는 그토록 막강하게 보이며 열방을 진압하고 지배하기에 족한 문무 겸전의 느부갓네살 왕이란 말인가? 그런 자가 이제는 등에 옷을 걸칠 만한 이성조차 갖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격동시키던 자가 아닌가?" (사 14:16) 지혜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며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 것이다.
(3)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그들을 얼마나 부끄럽게 하시며 멸시하시는지 살피자. 느부갓네살은 인간 이상이 되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인간 이하의 것으로 만드신 것은 지당하다(욥 40:11-13 참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조물주의 경쟁 상대로 자처한 그를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뜨리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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