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승리가 뒤집히는 순간: 요한계시록 11장 13절 "그 때에"에 관한 신학적 심층 분석
요한계시록 11장 13절의 '그 때에'는 단순한 시간 표현이 아닙니다. 이 글은 두 증인의 순교가 어떻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과 연결되는지, 그 신학적 의미를 심층 분석합니다. 세상의 승리가 뒤집히는 순간, 심판 속에서 열리는 회개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승리가 뒤집히는 순간: 요한계시록 11장 13절 "그 때에"에 관한 신학적 심층 분석
참고할 글
서론: 패배의 서사에서 신적 역전으로
요한계시록 11장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를 펼쳐 보입니다.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사이, 잠시 숨을 고르는 막간(interlude)에 위치한 이 장은 독자의 시선을 하늘의 심판에서 땅의 현실로 돌립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다 세상 권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도합니다. 그들의 시신은 길거리에 방치되고,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이는 악의 세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서사는 급격히 반전됩니다. 순교한 증인들이 다시 살아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장엄한 신원(vindication)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 소논문의 핵심 주제인 요한계시록 11장 13절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여기서 개역개정이 "그 때에"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문 'Kαιἐν ἐκεινῃ τῇ ὥρᾳ'("그리고 바로 그 시각에")는 단순한 시간적 연결어가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늘에서 일어난 증인들의 신원과 땅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즉각적이고 인과적으로 연결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연결고리(theological hinge)'입니다. 본 글은 이 시간적 연결고리가 어떻게 세상의 명백한 승리를 해체하고, 교회의 고난받는 증언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가능성을 촉발하는 핵심 동력임을 논증하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두 증인의 서사적 문맥을 살펴보고, '그 때에'라는 표현의 언어적·문학적 의미를 분석한 뒤, 지진의 결과로 나타난 '남은 자들'의 반응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비교하며 본문이 지닌 심오한 신학적 함의를 탐구할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보호와 세상적 박해의 역설적 서사 (계 11:1-12)
13절의 "그 때에"가 갖는 무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펼쳐진 서사적 드라마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3절의 사건은 무작위적 현상이 아니라, 앞선 12절까지의 이야기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서사는 교회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역설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합니다. 이 '측량' 행위는 물리적 보호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권을 확증하고 참된 교회의 정체성을 보존하시는 영적 보호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전 바깥마당'은 이방인들에게 내주어져 마흔두 달 동안 짓밟히도록 허용됩니다. 이는 가시적인 지상의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극심한 박해와 멸시, 외견상의 패배에 노출될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짓밟히는 교회의 모습만을 보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핵심적인 생명이 결코 침해받지 않는 이중적 현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들을 특정 역사적 인물이 아닌, 증언하는 교회 공동체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이들은 1,260일(마흔두 달과 동일한 고난의 시기) 동안 예언하다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세상('땅에 사는 자들')은 교회의 증언이 자신들의 양심을 괴롭게 했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길거리에 방치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큰 불명예와 저주를 상징하는 행위로, 이는 짐승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이 교회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확신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축제는 삼일 반 만에 끝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증인들은 다시 일어서고, "이리로 올라오라"는 하늘의 음성과 함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승천합니다. 이 사건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연상시키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순교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완전히 신원하시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완벽한 패배였던 교회의 순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전주곡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하늘의 신원 사건이, 13절에 기록된 지상의 심판을 촉발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원인이 됩니다.
2. 신학적 연결고리 'Kαιἐν ἐκεινῃ τῇ ὥρᾳ'의 심층 분석
앞선 서사의 절정 직후, 요한은 'Kαιἐν ἐκενῃ τῇ ὥρᾳ'("그리고 바로 그 시각에")라는 표현을 통해 하늘의 사건과 땅의 사건을 연결합니다. 이 구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호라(ὥρα)'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크로노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요한 문헌(요한복음,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정해진 결정적 시점, 즉 '카이로스(καιρος)'적 의미를 강하게 내포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나의 때(my hour)"(요 2:4)나 요한계시록의 "심판하실 시간(hour of judgment)"(계 14:7) 등이 그러한 용례입니다. 11장 13절에서는 여기에 지시사 '에케이네(ἐκεινῃ)', 즉 '바로 그'라는 의미가 더해져 시간의 특정성을 극도로 강조합니다. 이는 막연한 '그때'가 아니라, 바로 앞선 12절에서 순교한 증인들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간 '바로 그 특정하고 중대한 순간'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구문은 문장 전체의 서두에 위치하여, 증인들의 승천(12절)과 대지진(13절) 사이에 조금의 시간적 간격도 없다는 '즉각성'과 '인과성'을 문법적으로 구현합니다. 주석가들은 이 표현을 "바로 그 순간에(At that very moment)" 혹은 "그 직후에(Immediately after that)"로 번역할 것을 제안합니다. 저자 요한은 이 절대적 즉시성의 구문으로 두 사건을 묶음으로써, '세상이 교회를 박해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는 반박할 수 없는 서사적 논증을 구축합니다. 이는 박해받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신속히 임한다는 위로를, 박해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을 경고하는 변증적(polemical) 선언이 됩니다.
3. 지진과 남은 자들의 반응: 심판인가, 회개인가?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난 사건은 대지진, 상징적 파괴, 그리고 '남은 자들'의 반응입니다. 특히 마지막 반응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나뉩니다.
먼저, "큰 지진(seismos megas)"은 구약성경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 심판, 그리고 세상 권력의 해체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의 표상입니다. 이 지진으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사람 칠천 명이 죽습니다." 여기서 '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세상 체제 전체를, '십분의 일'은 제한적인 심판을 통해 아직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음을, 그리고 '칠천'이라는 숫자는 신적 완전수(7)와 충만수(1000)의 결합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가장 큰 논쟁거리는 지진에서 살아남은 '남은 자들(hoi loipoi)'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첫째, 진정한 회심으로 보는 견해
그레고리 K. 빌(G.K. Beale)과 같은 학자들은 이를 진정한 회개로 봅니다. 이전 나팔 재앙들 이후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던 완고한 모습(계 9:20-21)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려워함"과 "영광을 돌림"의 조합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구원과 관련된 긍정적 반응으로 나타납니다(계 14:7). 이 견해에 따르면, 재앙만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었던 회개를 순교자들의 신원된 증언이 마침내 이루어낸 것입니다. 즉, 교회의 값비싼 증언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진전되며, 심판이 구속적 경고의 기능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강요된 찬양으로 보는 견해
반면 일부 학자들은 이 반응이 진정한 회심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경외심이 아닌 순전한 공포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압도적인 힘 앞에서 마지못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심판의 송영(judgment dox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서 2장 19절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처럼, 마음의 변화 없는 지적 동의에 불과하다는 해석입니다.
이 두 해석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신학적 진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의 증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회개라는 긍정적 반응의 가능성이 나타나는 시점이 오직 증인들이 순교하고 신원을 받은 이후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신실한 증언,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증언이 하나님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심판과 구원의 행위를 이끌어내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임을 확립합니다.
결론: '그 때에'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요한계시록 11장 13절의 "Kαιἐν ἐκεινῃ τῇ ὥρᾳ", 즉 "바로 그 시각에"라는 구절은 단순한 시간적 표지를 넘어,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장엄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표현은 교회의 증언과 순교에 대한 하늘의 신원, 그리고 그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지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 사이에 깨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를 형성합니다.
남은 자들의 반응이 진정한 회심인지, 강요된 찬양인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은 계속될 것이지만, 두 해석 모두 세상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핵심 메시지를 공유합니다.
궁극적으로 요한계시록 11장 13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오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교회의 고난과 순교는 결코 패배의 징후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계획에 내재된 핵심 요소입니다. 세상에 의해 침묵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실한 증언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극적인 개입을 촉발하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바로 그 시각에"라는 약속은 박해받는 자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위로와 소망으로,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지상의 행위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 확실하고 즉각적이라는 엄중한 경고로 작용합니다. 성도들의 신원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촉발하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심판 속에서 회개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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