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끔찍한 악을 허용하시는가? : 성경적 난제에 대한 깊은 탐구

하나님은 왜 끔찍한 악을 허용하시는가? : 성경적 난제에 대한 깊은 탐구


하나님은 왜 끔찍한 악을 허용하시는가? : 성경적 난제에 대한 깊은 탐구



목차


  • 서론: 신학의 아포리아, 눈물 젖은 질문을 마주하다
  • 본론 1: 언어와 역사 속에 숨겨진 섭리 - 악의 정의와 동시 발생의 신비
  • 본론 2: 고통의 현존과 신학적 응답 - 자유의지부터 교수대에 달리신 하나님까지
  • 본론 3: 십자가, 악에 대한 최종적 승리 - 설명이 아닌 정복
  • 결론: 이해를 넘어선 신뢰, 상처 입은 치유자를 바라보며



서론: 신학의 아포리아, 눈물 젖은 질문을 마주하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는 이토록 끔찍한 악이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을 넘어, 상실의 아픔을 겪는 성도들이 흘리는 눈물의 근원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우리는 이 질문이 논리적 딜레마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재앙을 만난 이들의 처절한 실존적 절규임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악을 우리가 지성적으로 깔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견뎌내야 할 신비'이자 마침내 '정복되어야 할 적'으로 묘사합니다. 본고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와 현대 신학자들의 통찰,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악을 다루시는 독특하고도 은혜로운 방식을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끔찍한 악을 허용하시는가? : 성경적 난제에 대한 깊은 탐구



본론 1: 언어와 역사 속에 숨겨진 섭리 - 악의 정의와 동시 발생의 신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악'이라는 단어는 성경 원어에서 훨씬 더 복합적인 층위를 가집니다. 구약에서 악을 뜻하는 '라(Ra, רַע)'는 도덕적 사악함뿐만 아니라 기근, 전쟁, 질병과 같은 물리적 재앙이나 고통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나는 환난(ra)도 창조하나니"(사 45:7)라고 선포했을 때, 이는 하나님이 도덕적 죄를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역사의 재앙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반면 신약의 '포네로스(Poneros)'는 단순한 나쁨을 넘어 타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능동적이고 파괴적인 악의 세력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가 대적해야 할 인격적 실체로서의 사탄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악의 실존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요셉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악한 의도에 의해 팔려갔지만, 그는 훗날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라고 고백합니다. 존 프레임(John Frame)은 이를 '동시 발생(Concurrence)'의 교리로 설명합니다. 즉, 형들의 행위는 분명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악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악조차도 허용하시고 주권적으로 사용하셔서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적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의 저자는 아니시지만, 악조차도 그분의 거대한 구원 서사(Story) 안에서 선을 이루는 도구로 전용(subvert)되는 것입니다.



본론 2: 고통의 현존과 신학적 응답 - 자유의지부터 교수대에 달리신 하나님까지


교회사 속에서 신학자들은 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알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하나님이 기계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원하셨기에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는 필연적으로 악의 가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변증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거대한 비극 앞에서도 유효할까요?

홀로코스트 생존자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수용소에서 어린 소년이 교수형 당하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며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때 그가 들었던 내면의 응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다. 여기 이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이는 하나님이 고통받는 자들을 멀리서 관망하는 분이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운 현장에 친히 내려와 함께 아파하시는 '수난당하는 신'임을 보여줍니다. 유대교 랍비 전승 역시 고통을 '사랑의 징계'로 해석하거나, 악한 충동(예체르 하라)조차 토라 연구를 통해 극복하고 승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며 악에 대한 수동적 체념을 거부합니다.



본론 3: 십자가, 악에 대한 최종적 승리 - 설명이 아닌 정복


기독교 신학의 정점은 악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아닌,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에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고통당할 수 없는 신은 사랑할 수도 없는 신"이라고 역설하며,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 하나님 내부의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부르짖을 때, 성부 하나님 역시 아들을 잃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으며, 이로써 하나님은 악이 만들어낸 고통의 심연을 자신의 존재 안으로 흡수(absorb)하여 무력화시키셨습니다.

N.T. 라이트(N.T. Wright)는 하나님이 악을 다루시는 방식이 폭력적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새 창조'라고 주장합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악과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심판받았고, 부활을 통해 죽음이라는 악의 권세는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단순히 설명하거나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요한계시록의 비전처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승리하십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악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을 넘어, 이미 성취된 승리를 믿고 현재의 악에 저항하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결론: 이해를 넘어선 신뢰, 상처 입은 치유자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악을 기계적으로 없애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닙니다. 그분은 때로는 욥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침묵과 신비 속에 우리를 두시기도 하고, 요셉의 때처럼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대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속에 홀로 두지 않으시고,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우리와 함께 우시며 그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악의 문제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악은 여전히 우리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악을 이기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밤을 지날지라도, 부활의 아침이 반드시 올 것임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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