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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90년 즈음의 얌니아 회의가 히브리 성경을 확정하였는가? 성경의 역사와 정경화 역사

   히브리 성경은 언제 정경화가 되었을까요? 많은 시간 동안 쓰여지고 편집되어진 히브리 성경은 그 저작 역사가 분명하지 않고 복잡한 만큼, 정경화의 역사 역시 분명하지 않고 복잡합니다. 일반적으로 얌니아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회의를 통하여 히브리 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완료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얌니아 회의에 모였던 사람들이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할 만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히브리 성경의 편집과 정경화 역사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1. 히브리 성경의 형성 역사(바로가기)
  2. 히브리 성경의 정경화 역사(바로가기)
  3. 히브리 성경의 토라, 느비임 그리고 케투빔의 편집 역사(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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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니아 회의와 히브리 성경의 역사

   주후 90년 즈음에, 얌니아(Jamnia)라는 마을에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유대교 신앙이 성전이 없는 가운데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성전이 없는 현재 상황 속에서 유대교와 관련된 희생제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얌니아에서 논의된 사항들 중에는 유대교에 대한 특별한 저술 권위도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종종 학자들은 얌니아 회의에서 히브리 성경을 편집하거나 수정 혹은 정경화를 마무리 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모임은 유대교 전체를 대표할 만한 권위를 가진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교를 재정비하고 보존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역 출신의 특정한 유대인 학자들이 모였던 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생활,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 이외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공식적인 권한이 없었습니다. 

   둘째,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 부적절한 표현으로 여겨지는 일부의 책들이 4세기 말까지 정경화가 확정되지 않은 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얌니아에서 있었던 모임은 여러 책들의 권위에 대한 결정과 히브리 성경에 대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얌니아 회의가 시사하는 바는, 1세기 말에 "정경"이나 권위 있는 성경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을 뿐이며, 논쟁 중인 책들은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추가적인 증거로는, 1세기 말까지 유대 사회에 생겨나던 여러 제약들에 대해 요세푸스와 에스드라 2서('제4 에스라'라고 부르기도 함)에서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로서 1세기 말까지의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권위를 가진 22권의 책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사사기와 룻기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서가 한 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오늘날 히브리 성경을 구성하는 24권과 동일한 자료들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주후 100년 경에 쓰여진 유대인들의 문헌인 에스드라 2서의 저자는 두 그룹의 책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24권의 책들은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며, 다른 유대인들이 기록한 70권의 책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반드시 남겨 두어야만 하는 유용한 책들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에스드라 2서 14).


히브리 성경의 정경화 역사

   학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성경들을 배제하고 또 다른 성경들은 포함을 시켰는지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정경화의 과정에서 볼 때, 고대의 글에서 발견된 주석들은 적합성과 영감, 히브리어 그리고 광범위한 사용 등의 네 가지 가능한 기준에 따라서 권위의 여부가 결정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권위가 있다고 여겨졌던 책들은, 토라의 가르침을 담고 있고 유대인들의 믿음과 실천 속에 이미 규범으로서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글이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정경으로 인정된 책들은 거룩한 영감을 받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것이어만 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의 집단에서는, 예언자들의 거룩한 영감은 에스라 시대 이후에 중단이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쓰여진 것은 거룩한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므로 정경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사실, 정경으로 인정되어진 일부의 성경들은 5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도 있습니다). 또 처음부터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이 아닌 성경들은 제외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어로 쓰여진 성경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타락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는 예언자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로 쓰여진 성경은 영감을 주는 글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경이 유대인들의 실생활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는가였습니다. 결국 유대교 안에서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 받은 성경들은, 이미 그 내용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책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유대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대한 이해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책들이었습니다.


히브리 성경과 기독교

   히브리 성경의 형성과 정경화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한계나 종료에 대한 정확한 이유들은 불분명합니다. 한 가지 요인으로, 초기 기독교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주후 70년에 헤롯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재검토의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자신들의 신앙을 정의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떤 글이 히브리 성경에 속하고 어떤 글이 히브리 성경에서 제외되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주후 132-135년에 로마에 저항하던 유대인들의 반란이 줄을 이었고, 그 이후에는 대부분의 종말론적인 글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갔었습니다. 이같은 현상의 결과로 대부분의 종말론적 문헌들을 유대인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다니엘서와 이사야 24-26장의 경우에는 이러한 현상 속에서도 살아 남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되고 확정되어진 성경입니다. 오랜 시간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의 관계를 영감 있게 설명해 주고 실생활 속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는 성경은 "히브리 성경"의 정경화 과정 속에 포함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경화된 24권의 히브리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구약성경 39권으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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