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감사가 형식적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추수감사절의 헌금을 부담스러워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같은 부분들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추수감사주일 설교로 전합니다.
신명기 16장 9절-22절,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들어가며
오늘은 우리 한국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위에서 종종 오늘날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또는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추수에 대한 감사를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며, 추수감사절의 근거도 미국의 청교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근거
먼저, 추수감사절의 근거는 성경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함께 드려지는 절기였고 이웃들과 함께 자신들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절기였습니다.
오늘날 추수감사절을 지킴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형식만 있고 본질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과 자세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되겠습니까?
먼저, 정한 시기에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맥추절과 장막절의 시기를 정해주시면서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지키라고 하였습니다(신 16:10, 15. 참고, 신 26:1-11). 이것은 온 교회가 규칙적으로 시기를 정해놓고 지키되, 예배를 드림으로 지켜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를 정하고 우리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또한, 좀 더 구체적인 부분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곡식을 강대상에 쌓아 놓고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곡식을 강대상에 올려놓는 순서를 갖는데 저는 그것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감사의 마음이 담겨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사의 마음이 예배의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두 종류의 감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은 “너희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키라(12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감사를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삶에 복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5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감사의 예배가 시기적으로는 수확 후에 지키는 절기이지만 단순히 추수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삶 전체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포괄적인 감사 때문에 드려져야 함을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그리고 나의 삶 전체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과 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물질의 표현이 있는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물을 드리라(10절).”고 하고, “공수로 보이지 말라(16절).”고 말씀합니다. 말만의 감사가 아니라 감사의 마음이 물질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복 주심을 인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너의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고 말씀합니다. 물질의 표현이 없는 말로만 하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의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네 힘을 헤아려(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17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가지고 나오되, 항상 자신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에서도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골 2:6-7). 인색하게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현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에는 주관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드릴 때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예물을 지정하지 않고 여러 가지 예물 중 하나를 선택해서 드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번제를 드릴 때 소나 양이나 비둘기 중에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형편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물을 드릴 때 자원함과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10절).”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물질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되 하나님께서 명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거나,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봐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참고, 고후 9:7). 우리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헌금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는 하나님께 헌금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나 억지로 돈을 모금하는 수준에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겁을 주어 물질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런 것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전문 부흥사를 초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헌금의 무분별한 강조 때문에 시험에 드는 성도도 많고 기독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헌금을 인위적으로 강요하거나 억지로 걷어서는 안 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에 대한 원리는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이 추수감사절에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 풍성함을 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자원함과 기쁨으로 예물을 드리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갚아 줄 것이기 때문에 헌금을 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헌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귀한 물질을 주님께 드리면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헌금의 목적이 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헌금의 본질이 아닙니다. 헌금의 본질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감사함과 기쁨으로 즐겨내는 것입니다. 바른 헌금의 동기가 필요합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추수감사절
또 한 가지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11,14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만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추수감사절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웃을 교회 공동체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명령이 주로 믿음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안에서의 사랑과 보호와 관심을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속하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성경 구절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구약에서의 사회적 약자,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범위와 한계가 어떠한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율법사가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이웃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어려운 상황만을 보고 도왔습니다. 어떤 조건도 고려하지 않고 비계산적인 사랑으로 어떤 기대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사람의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에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강도만난 사람을 돌아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올 때에 갚을 것이라고 하면서 후속 조치까지 취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가족, 친척, 친구, 교회 공동체 또는 동족의 한계를 넘어서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이웃임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심판의 중요한 내용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등에게 한 일이 바로 주님께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의 약하고 없는 자를 마치 주님을 섬기듯 하라고 명하심으로 이웃 사랑과 섬김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야고보 사도도 말로만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였으며(약 2:14-17),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에서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약 2:27).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교회 전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우리 주위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을 찾아서 실제적으로 그들을 도와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추수감사절은 감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절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의 물질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의 예물도 최선을 다해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감사의 삶이고 경건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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