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종교에서 섬기는 바알의 여러 모습과 가나안 종교의 특징을 지금껏 알아 보았습니다. 가나안 종교만의 특징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우상 숭배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반복되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우상 숭배에 빠져든 원인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고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쾌락과 세속적인 부유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연약함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하게 된 이유 3가지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정리하였습니다.
우상 숭배의 원인 3가지
1. 가나안의 풍요의 원인에 대한 관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반(半)유목민이었던 위치에서 비옥한 초숭달 지대에 정착한 농민의 위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오랜 유랑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들은 곡식과 가축의 다산 등 그 땅의 풍요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 없던 안정된 생활과 풍요로움을 맛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풍요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바로 가나안의 종교를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가나안의 신화적 세계관의 영향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 삶의 방식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농업에 종사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곡식 재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강우량이나 계절의 변화 등 자연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상의 과학적인 원리를 잘 알고 있는 오늘날의 농부조차도 풍부한 수확을 산출하는 토양의 생산력 등 자연의 신비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더구나 현대에 비해 자연력에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했던 고대의 생활 배경 가운데, 자연의 신비가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자연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신이 배후에서 자연의 변화를 주관한다고 믿는 가나안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대에는 현대와 달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신화적(神話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과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고대 농경 사회에서 자연의 배후에 그것의 변화와 순환을 지배하는 신들이 존재한다는 사고 방식을 무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하였지만, 자연의 순환을 지배하는 신들의 영향을 인정하는 당시 가나안인들의 세계관이 어느 사이에 이스라엘의 사고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3. 종교적 혼합주의
가나안의 풍요 속에서, 그리고 그 배후에서 그 풍요를 주관하는 신들의 존재를 믿는 가나안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스라엘의 여호와 유일 신앙은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 하나님께 완전히 등을 돌리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앙의 도전 속에서 하나의 절충점을 찾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마치 많은 현대인들이 종교와 과학을 별개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그들은 여호와 신앙과 가나안 농경 사회의 종교적 관습을 별개의 영역으로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양자 택일의 관점에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택하는 식의 선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과 그 땅의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것이 상호 배타적이거나 모순된 것으로 생각지 않았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과 바알을 섬기는 것이 병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 종교의 제의와 교리에 대해 수용하는 자세를 종교적 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라고 하는데,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에 의하여 여호와 신앙과 가나안 종교의 요소들은 끊임없이 뒤섞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어떠한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생활의 전반에 걸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실제로는 여호와를 버리는 배반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호와를 섬기느냐 바알을 섬기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만을 섬기느냐 바알도 함께 섬기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 어느 하나를 분명히 택하지 못하는 종교적 혼합주의야말로 일찍이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한 여호수아와, 이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을지니라"(왕상 18:2 1)고 한 엘리야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도전의 핵심이었습니다.
가나안 우상 숭배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교훈
구약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우상이 만들어지게 되는 배경이나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동기에는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미지의 영적 존재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고 방식은, 삶의 안정과 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동기와 맞물려 인간으로 하여금 각양 각색의 우상들을 만들어 섬기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동기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근본 원인은 인간이 타락하여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진정으로 자연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지, 또 그 절대자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인간의 우상 숭배는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나안 우상들의 종류 및 특정과 그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문제점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본질은 기복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펴본 바대로, 가나안 우상들은 인간에게 어떤 도덕적 요구도 하지 않으며 인간들 역시 농작의 풍요를 원하는 현실적 동기에 의해서 그 신들을 섬길 뿐이었습니다. 우상의 특징은 인간에게 어떠한 종교적 도덕적 요구를 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를 섬기면 현실적 복을 준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먼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의를 행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복을 주시며 또 실제로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 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주시는 복의 특정은 순종과 믿음의 인격적 관계성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순종하며 의를 행하는 삶을 살기 이전에 복을 구하는 것은 우상 숭배자들의 행태를 그대로 본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둘째, 당대의 불신적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인들은 신화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화적 세계관이란 자연의 배후에는 자연의 변화를 지배하는 신들이 있으며, 결국 그 신들의 활동 여부에 따라 인간의 풍요와 운명이 좌우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계관은, 자연 만물은 물론 온 땅과 우주를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신앙과는 상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세계관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향을 받아 그 신화적 사고에 따라 우상들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이는 마치 일부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성경적 창조론을 버리고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을 신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과학이 유토피아를 이루어 주리라고 하는 과학 만능주의(Scientism), 경제적 풍요와 안정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경제 지상주의(Economism), 그리고 인간이 의식의 도약(a reap of consciousness)을 통하여 영적인 존재로 진화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 새 천년기의 세계관을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당대의 불신앙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기독교적 가치와 세계관을 형성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종교적 혼합주의의 극복입니다.
종교적 혼합주의의 본질은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만 바알도 함께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유혹은 현대에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현대는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의 시대입니다.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타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의 태도를 보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마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일신 여호와를 믿는 신앙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것으로 느끼도록 만들며, 타종교와도 교류하고 연합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마 6:24)고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화적 관용과 포용성의 이름으로 포장한다 하여도 혼합주의적 시도는 여호와 종교에 대한 악의에 찬 유혹일 뿐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은 유형적인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는데 힘써야 합니다.
우상의 본질이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해 섬기는 것이라면, 우상은 꼭 형태를 지닌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명예욕 등이 우상이 될 수 있으며, 특히 현대에는 황금 만능주의로 인한 물질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인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 우상이 없는지 늘 살펴보아야 하며,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신 6:4).
참고할 글
이스라엘이 섬겼던 가나안 종교의 특징 4가지(feat. 바알과 아세라) - 성경사전
바알 신화를 기초로 살펴 본 가나안 우상들의 종류 - 성경연대표도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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