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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주석] 다니엘 9장 20절-27절, 응답받은 다니엘의 기도 - 주석과 해설 정리

다니엘 9장 20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동안 하나님의 천사인 가브리엘이 칠십 이레가 70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매일성경큐티와 10분새벽설교를 위한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다니엘 9장 20절-27절, 응답받은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 9장 20절-27절, 응답받은 다니엘의 기도


우리는 여기에서 다니엘의 기도가 곧바로 응답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대단히 기억해 둘 만한 것 가운데 하나인데, 모든 "구약 성서" 중에 있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한 예언으로서는 가장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례 요한이 새벽별이었다면, 이것은 "의의태양" 곧 "위로부터 돋는 해" 의 새벽이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응답이 주어진 때.


1. 다니엘이 기도하는 때.

그때는 다니엘이 아직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것을 다니엘이 크게 강조한다. "내가 이같이 말하고 있을 때" (20절). 또 "기도로 말하고 있을 때에" (21절), 다니엘이 무릎을 펴고 일어나기 전에,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아직 더 남아 있었을 때였다.

(1) 다니엘은 그가 기도에서 주로 바라고 있던 두 가지의 골자를 언급한다.

[1] 다니엘은 죄를 고백하면서, 그것을 통애했다. 즉 "내 자신의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 에 대해서 그리했다. 다니엘은 지위가 있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할 그 자신의 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죄를 기꺼이 고백한다.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죄를 짓지 않는 의인," 또 죄를 짓고 후회하지 않는 인간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자기들은 "죄가 없다" 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 되는, 그래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는" 자들 중의 하나로 간주했다(요일 1:8).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다(하나님께 잘못함) 자신들의 괴로움을 털어놓는 것은 양심을 편케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이 "죄를 고백하는 일" 이다. 다니엘은 또한 "자기 백성들의 죄" 를 고백하였고, 그 죄를 슬퍼하였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하는 사람들, 교회의 부흥과 인간의 영혼에 관심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도 슬퍼할 것이다. [2] 다니엘은 "그의 주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있었다." 또 그 간구는 이스라엘을 위한 중재자로서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다. 그리고 이 기도에서 다니엘의 관심은 그의 "하나님의 거룩한 산," 즉 "시온 산"이었다. 성소의 황폐가 땅과 도성의 황폐보다 더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황폐한 성소의 재건,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예배의 확립이 저들의 시민적 관심사의 재건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였고, 또 그가 바라는 구출도 바로 그런 뜻에서였다.

(2) 다니엘은 그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에,

[1] 하나님은 그에게 기도하는 자비를 허락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실 준비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응답을 하신다는 것에 주목하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 즉" 그들이 다 말하기 전에 나는 들을 것이다" (사 65:24)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다니엘은 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었고 성의를 더하였다(18,19절). 그리고 다니엘이 그렇게 열심히 "말하고 있던 동안," 천사가 은혜스러운 답변을 가지고 그에게로 왔다. 하나님은 생명력 있는 신앙심을 기뻐하신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실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하여 열심히 기도한다면, 신앙에 의해서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으로 그 약속을 이루어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후일 자기가 자기의 교회를 위해서 이루실 보다 크고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해 일러 주셨다.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은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저녁 제사 드릴 때 즈음.

그때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쯤이었다(21절). 제단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아무런 제품도 없었다. 그러나 포로기 중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날마다 제사드릴 때를 기억하면서 눈물지었을 것이며, 자기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으로써 드려질" 것을 믿고 희망했을 것이다. 또 "자기들의 손을 쳐들고," 그 손과 더불어 저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눈에는 "저녁 제물처럼 받아 들여지기를" 희망했다(시 141:2). 저녁 제사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황혼에 드린 위대한 희생 제사의 한 모형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이 "주를 위해"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가 열납된 것도 바로(그리스도가 드릴)제사의 직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사랑이 다니엘에게 알려진 것이다. 어린양은 그 자신의 피로써 "봉함을 떼었다."



응답을 가져다 준 가브리엘 천사


천사에 의해서 이 응답이 주어졌다. 그 답변은 꿈에서 주어진 것도 아니요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확실성과 엄숙성을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가 직접 가지고 왔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더 관찰해 보자.


1. 이 천사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사람 가브리엘"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일 미가엘 천사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가브리엘은 성서에 그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피로 된 천사이다. 가브리엘이란 "하나님의 전능한 자" 를 뜻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힘과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벧후 2:11). 그 천사는 다니엘이 이전에 이상 중에 본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그 천사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천사가 가까이 왔을 때 비록 두려워 떨었지만, 천사를 주의깊게 살펴보았고, 그가 이전의 환상에서 본 가브리엘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전에 떨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 천사가 스가랴에게 "스가랴야, 나는 가브리엘" 라고 말했을 때(눅 1:19) 그것은, 다니엘에게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주었던 이 소식 곧 메시야의 도래를 알렸던 이 통고를 그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2. 천사가 가져온 소식은 무엇인가?

다니엘이 기도한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이 천사가 받은 소식은 무엇이었나?(23절) "기도(간구)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말씀)이 내렸다."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자문회에서 천사들에게 전갈이 내렸다. 천사들은 그런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다니엘에게 곧 가져가라고 가브리엘에게 명령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 것은 다니엘이 기도 자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응답이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기도의 의무에 진실한 것을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에게 이 은혜스러운 소식을 전하셨다.

혹은 앞에 언급되었던 바(25절)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고레스 왕의 명령" 이 바로 "다니엘의 기도가 시작되던 때" 에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날에 이 일이 실시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자유의 선언이 이 날 아침에 서명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 금식일이 끝나가는 이제 다니엘은 "속죄일" 의 끝에서처럼, 희년의 나팔이 자유를 알리는 통지를 받았다.


3. 빨리 날아온 가브리엘 천사.

천사는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했다. "가브리엘은 빨리 날아서" 왔다(21절). 천사들은 날개가 달린 사신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빨리 움직이며, 그들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는데 지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번개같은 생물처럼" 왕래한다 (겔 1:14).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다른때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움직인다. 즉 가브리엘이 여기서 "재빨리 날아" 온 것과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의존하여 그들의 일을 실행한다. 비록 그들이 지혜가 탁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빨리, 혹은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고 천사들이 비록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만 나를 수 있다. 천사들 자신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 (일군)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을 행한다(시 103:21).


4. 천사의 메시지의 서론.

(1) 천사는 "다니엘을 만졌다" (21절). 전에 그랬던 것처럼 (8:18),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도를 중지하고 자기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의 전후를 살펴야 하며, 망대 위에서 살펴야 한다.

(2)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과 아주 친근하게, 마치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대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그와 말했다(22절). 그것은 "그의 공포가 그 (다니엘)를 두렵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자기의 용무를 다니엘에게 말했다. 즉 하늘로부터 그에게 친절한 소식을 가져왔다고 했다. "나는 네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길들을 말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23절).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교회가 안티오커스 아래서 박해받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재난의 기간을 보여 주었다(8:19). 그러나 이제는 더 큰 일을 다니엘에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신실한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이다. "나는 너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나니, 이 일들을 너에게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이니라."

(3)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그가 하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확신시킨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왔다. 너는 바람직한 사람이요, 하나님께 용납된 자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니라."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가슴에 안긴 한 제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받던 제자" 는 다니엘이 구약 성서의 예언적 환상을 위임 받았던 것처럼, 신약 성서에서 예언적 환상을 위임받았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친구"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고 말씀하신다(창 18:17).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계시해 주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알 수 있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준 칭호가 여기서 다니엘에게 주는 칭호와 대단히 비슷하며, 그것은 그녀에게 이것을 상기시켜 주려 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너는 크게 은총(총애)을 입은 자라" 라는 것이다. 다니엘에게도 "크게 은총(사랑)을 입은 자" 라고 했다.

(4)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이제부터의 자기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23절). 이것은 그의 말이 다니엘이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환상보다도 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이상들을 숙고해야 하며,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비교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깊은 생각(숙고)의 부족 때문이다. 이 환상은 깊은 생각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런 숙고를 할 만한 것들이다.



메시지의 내용


그 소식은 대단히 엄숙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대단한 관심이 기울여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언들이 그런 것처럼 거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엇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통해서 70년간의 포로 생활이 끝나감을 이해하고 있었던 다니엘은, 이제 영광스럽게도 다른 곳보다 더 먼저 영광스러운 해방을 교회에게 알리도록 선택된다. 먼저 것은 나중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것은 70주간(週間)이 지나면 곧 해방이 있다. 다니엘은 그 예언을 넘어서 있는 것을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해 이 같은 응답을 받은 것이다. 다니엘은 "자기 백성" 과 "거룩한 도성" 을 위해서 기도했다. 즉 "저들" 의 석방과 "그것" (도성)의 재건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이 생각하거나 요구했던 것 이상의 것을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시 21:4).


1. 기간에 대한 문제점.

여기에 확정된 시간은 다소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 기간은 "칠십 주간," 즉 "7년의 70배" 인 49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도성에 관해서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은 이 490년이 다하기 전에 있을 것이다.

(1) 따라서 여기서는 햇수가 주(週)로 서술되었다.

[1] 이것은 대부분인 예언자적 문체와 주화되는 것이다. 예언의 문제는 일상적인 화법과는 달리, 너무 분명한 것은 피해서 되어 있다. [2] 본래 안식일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시간을 주간으로 나눈 제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서이며, 그 영광이 영원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3] 70년 동안의 포로 기간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그들 자신의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면 7배나 오래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더욱 즐겨하신다. 그 땅은 좋지 아니한 의미에서, 70년 동안을 "안식하였다" (레 26:34).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의미에서, 70년의 7배나 되는 기간을 안식할 것이다. 이것은 희년을 열 번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비율이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미리 정해진 시간을 작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70 주간에 대해서 생기는 난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시작과 끝나는 때에 대한 것이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재건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는 때부터" 라고 했다(25절). 나는 그것은 에스라서 1장 1절에 언급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언급이 밝혀 나타나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전 건축이 암시되었고, 또 그것이 그레스에 의해서 실시되리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사 44:28). 고레스가 "너를 재건하리라고 예루살렘에게 말하게 되리라." 이것은 예언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예루살렘의 건축에 대한 가장 유명한 조서이었다. 아니, (고레스의 명령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었던)" 이 명령의 공포" 는 "다니엘의 기도의 시작" 에서(23절) 언급된 명령의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0주간이 70년이 만기되지 즉시 시작된다는 것은 대단히 은혜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이 사실에 의해서 계산하면,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정복 때부터 알렉산더가 다리오를 정복한 때까지 "바사 왕국" 은 겨우 130년간 존속했다는 결론이 나와 문제가 된다. 반면에 바사 황제의 통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에 의하면, 바사 제국은 230년 간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키디데스(Thucydbdes), 크세노폰(Xenophon),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렇게 계산한다. 이 때를 첫 번째 조서가 내려진 때로 정하는 사람들은 이방 역사가들의 위와 같은 연대 계산을 불확실하고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계산에 동조한다. 그래서 그 490년을 고레스의 조서에서(에 1:1)가 아니라, 에스라서 6장에 언급된바 약 백 년 이후에 있었던 다리오에 의해서 선포된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두 번째 조서에서 시작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를 보낸 왕 아닥사스다 제7년에 못박는다.(에 7:8-12). 박학자 풀(Poole)씨는, 그의 라틴 대조표에서 이 70주간의 시작에 대한 여러 견해차를 아주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수집해 놓았다. [2] 그 시기의 종말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이때에 대해서도 해석자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라고 하여, 이 유명한 예언의 명시적인 말들을 보면,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저녁 제사 때에 말했던 바로 그 시간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죽은 때(그 때도 저녁 무렵이었다)까지의 기간을 말해 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 기간은 정확하게 490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주간의 절반에(즉 70주간의 마지막 주간에), 그가 제사와 예물을 중지시킬 것이다(27절)라는 말이 있으므로, 그때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때요,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해 나아가던 때이다. 그러나 그 때를 정확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27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것이다. 즉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을 강화시킬 것이다. 최후의 7일, 혹은 최후의 한 주간, 그리고 그 주간의 절반 곧 7년의 절반(즉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보낸 3년 반)은 희생과 봉헌을 그치게 할 것이다" 고 해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때를 그리스도가 죽은 후 37년 경, 예루살렘의 파괴 때까지로 계산한다. 그것은 이 70주간이 유대 백성과 "그들의 거룩한 도성에 대해 정해지리라" 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소의 파괴에 대해 많은 것이 나와 있다. [3] 그것은 7주간과 62주간, 그리고 1주간으로 나눈 것에 대한 난점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첫 번째 일곱 주간 곧 49년이 지난 때에 성전과 도성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복음의 선포에 의해서 유대적 질서는 무너졌다. 그리하여 복음의 도성과 성전을 위한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전자의 잿더미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3) 그러나 이들 시간을 정확히 정하는 것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그 때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가지 중대한 목적이 있다.

[1]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기대를 일으키는 구실을 한다. 메시야의 도래하리라는 막연한 약속이 족장들에게 주어졌었다. 이전의 예언자들은 메시야를 "오실 분"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도래에 대한 정확한 때는 말해지지 않았다. 비록 이 때에 대한 대단한 의심이 있어서 그 때를 확정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이 예언의 빛에 의해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릴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일반적으로 보면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로써,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안다(눅 2:25, 38).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곧바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눅 19:11).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행 2:5). [2] 그것은 지금도 불신자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묵살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들 불신자들은 예수가" 오실 분"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들이다. 이 예언은 그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이 70주간을 계산하면, 그 기간은 1500년 전에 다 찼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잘못 계산하고 있는 동안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그러나 이 사실에 의해서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으며,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미리 정해진 그 시간에 왔고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시각에 오셨던 분이다.


2. 예언된 사건의 정체.

여기에 예언된 사건들은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보다 평이하고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된 사건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 유대인들이 자기 조국에 되돌아올 것이며, 다시 그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일차적으로 간구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는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러 가라는 명령" 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으리라(25절). 그리고 그 명령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시대가 대단히 어려웠고, 동시에 그 선한 일이 반대에 부딪힐 것이지만, 결국 수행될 것이며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곤란한 동안" 일지라도 "성벽" 과 길거리가 세워졌듯이, 그 "길거리가 다시 재건되어" 전과 같이 아름답게 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언제고 "곤란한 때"를 각오해야 된다. "즐거운 때" 에도 떨리는 마음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섬광에 불과하다. 또한 평화와 번영으로 빛나는 막간에 불과하다. 구름은 "비가 온 후" 에도 되돌아 올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땅을 되찾았을 때에도, 그들은 "곤란한 때" 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며, 그의 예루살렘을 중건하시고 아름답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의 기쁨이다. 아니, 오히려 때의 곤란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교회를 더 발전시켜 줄 것이다. 교회는 어려울수록 성장한다.

(2) 메시야와 메시야의 사업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다. 현세적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자기들을 로마제국의 멍에에서 구출하고, 세속적인 권세와 부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에 여기에서는 메시야가 다른 사명, 즉 순수하게 영적인 사명을 위해 오셔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오셨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반목을 갖게 했고,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켰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적하도록 자극시켰다.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한 것도 죄며,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온 것도 죄였다. 죄는 진실로 재난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하나님께 진실한 봉사를 하려는 사람, 그리고 참으로 인간에게 친절을 베풀려는 사람은 죄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하러 오셨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 그리스도가 오셨다." 즉 "악마의 일을 부수기 위해서" 이다. 그리스도는 "너희의 죄와 범죄를" "버리라" 고 말하지 않는다. 죄와 범죄 일반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곧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물" 이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는 먼저 범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또 "죄를 끝내고" 죄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리고 숱한 재난을 일으키는 "뱀의 머리"를 파쇄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거룩함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사탄의 왕국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은혜를 통한 정의와 생명이 지배하는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죽을 때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그리스도는 "죄를 종결짓기 위해서," 제거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스도가 악마를 깊은 구멍에 던지셨을 때, 그는 "악마를 인봉하셨던" 것이다(계 20:3). 죄가 용서될 때, 죄는 마치 봉인될 것과 같이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화해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만복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함과 같은 것이다. 그는 심판관처럼 다투는 양편을 서로 잘 이해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우리를 편들어 주시는 보증인이시다. [2] 그리스도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없애심으로써 죄를 도말하더라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방법을 발견하셨다. 죄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죄를 없애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으로서 정죄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다면 우리의 순결이 우리의 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타락(넘어짐)한 이상, 우리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에게 호소거리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독이 "우리의 의" 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채운다. 즉" 그리스도는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주(主) 우리 의(義)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의가 되셨고,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그 의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의로 여김을" 받게 된다(롬 4:3, 5). 이것은 "영원한" 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 이며 동시에 우리의 "평화의 왕" 이신 그리스도가 "영원한 아버지" 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원 전부터 있었고, 또 영원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의 적용은 태초부터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한 공덕이다(히 10:12). 그것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반석" 이다. [3] 그리스도는 "환상과 예언," 즉 메시야를 언급하는 구약 성서의 모든 예언적 환상들을 "응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들의 봉인을 떼셨다. 즉 그 환상들을 성취하심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셨다. 메시야에 대해서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사명은 물론이요 그것들의 진리성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환상들을 "응하셨다" (봉인했다-영문 성서). 즉 그는 그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려는 예언과 환상의 방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벧후 1:19; 히 1:1). [4] 그리스도는 "지극히 거룩한 자" 에게 "기름붓기 위해서 오셨다." 그 지극히 거룩한 자는 바로 성령에 의해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자신이다. 그는 그의 동료에 비해서 기쁨의 기름을 "넘치도록" 받았다. 혹은 복음의 교회와 그의 영적 성전, 혹은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붓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기위해서 오신 것이다(엡 5:26). 혹은 그 자신의 보혈에 의해서(히 10:20), 우리에게 "지성소에 들어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 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성소가 "기름부음 받은" 것과 같다(출 30:25 이하). 그리스도는 "메시야" 라고 불리운다(25,26절). 그것은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 (요 1:41)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5]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메시야는 "끊어져야" 한다. 즉 참혹하게 죽어야만 하고, 이사야 53장 8절에서 예언된 것처럼 "모든 산 자의 땅에서 끊김" 을 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교할 때, 예언자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말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행 26:22, 23). 그리스도는 고난받으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끊김을 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야바가 예언한 대로,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즉 우리를 위해 대신, 우리의 선을 위해서였다. 그 "끊김" 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죽음이었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이었다. [6]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계약, 즉 은혜의 계약을 수립해야 한다. 죄없는(무흠한)계약에 의해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고 세례와 만찬(이것은 새 언약의 "인" 이다)에 의해서 수립한 이 제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계약(유언)을 유효하게 했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의해서 물려받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곧 대중들을 위해 그 계약을 세우셨다. "지배자들" 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에도, 가난한 자들은 "전도를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 계약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세우셨다. 즉 이방 세계에도 주셨다. 신약 성서는(구약 성서와는 달리)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라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로 주셨다. [7] 그는 "희생 제사와 예물을 끊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제사적 희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들을 제거해버렸다. 본체적인 것이 나타날 때는 그림자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을 이룩했을 때, 그리고 그 십자가에 의해서 화해와 평화의 계약을 수립했을 때, 모든 화목 제물을 중지시켰던 것이다. 세상에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함으로써(이 일은 사도들이 맡았다)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양과 염소의 피에 의한 용서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희생 제사와 예물을 끊은" 것이다. 사도는 히브리서신에서 당시 율법 아래 있던 것과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무엇이 훌륭한 제사장 제도이며 희생 제물과 제단인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3)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대 교회, 그리고 유대 국가의 파괴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메시야의 끊김에 곧바로 뒤따른다. 그 이유는 그 같은 파괴가 메시야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의로운 심판" 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메시야의 죽음이 목적한 중대한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의식적인 율법을 제거하고, "계명의 율법" 과 그 의무를 폐지하기 위해 죽으셧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뜻에 따라 그것을 폐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 그들은 스데반(그는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였다)이, 예수는 "모세나 그들에게 준 전통을 변화시켰다" (행 6:14)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죽였다. 그러므로 성전과 거룩한 도성, 그리고 율법적 제사를 제거시키지 아니하고는, 모세의 질서를 폐지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죽은 후 40년도 못되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파괴는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아니한" 황폐를 가져왔다. 그리로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 중건을 재건한다하여 지나치게 교만하지 말아야 될 이유이다. 그것이 여기에 자세히 예언되어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오면 그런 것들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여기서처럼 70년 동안만이 아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도래를 희망하면서 기뻐하고, 그리고 "결코 파괴되지 않을" 메시야의 영적 왕국이 건설될 것을 즐거워하자.

[1] 여기에서는 "장차 올 한 왕의 백성" 이 이러한 파멸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다. 즉 그 도구는 바로 로마의 군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장차의 왕국에 속해있다. 그리스도는 장차을 왕이요, 그들은 그에 의해서 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은 "그의 군대" 이다(마 22:7). 또 이방인들(지금은 외국인이나 메시야의 백성이 될 자들이다)이 유대를 파괴할 것이다. [2] 그 파괴는 "전쟁에 의해서" 생길 것이며, 그 "전쟁의 종말" 이 미리 "결정된 황폐" 가 되리라, 로마인과 유대인의 전쟁은 유대인들 자신의 완고함 때문에 오래 그리고 참혹한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들이 아주 희소해지는 것이 되리라. [3] 도시와 성소는 특별한 방식으로 파멸당할 것이다. 로마의 장군 디투스(Titus)는 성전을 구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군사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아주 분노하였기 때문에, 그는 병졸들이 성전을 불태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예언은 성취된 것이다. [4] 모든 저항은 무익한 것이었다. "그것의 종말은 홍수처럼 될 것이다." 그것은 옛 세계를 쓸어버릴 파괴의 대홍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파멸을 막아낼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다. [5] 이렇게 해서 "희생 제물과 예물은 종식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가족들이 없어졌고 또한 제사장의 족보가 대단히 혼란하게 되어서, 세상에는 자기를 아론의 후예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중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6] "가증스런 것이 만연" 될 것이다. 즉 유대 민족의 전반적인 타락과 유대인들의 불의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살전 2:16). 혹은 "가증스러운 것" 을 유대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던 로마 군대로 볼 수도 있다(그들 로마의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유대 "나라를 휩쓸었고," 그것 때문에 그 나라는 "황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것을 언급하셨다(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것은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 또 설명되어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7] 그 황폐는 전체적이고도 최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완전히 종말에 이르기까지 황폐하게 한 것이다." 즉 그가 완전히 황폐케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작정된 황폐" 이다. 그리고 그 황폐함은 철저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황폐해질 때, 또 하나의 작정된 것이 있으니, "황폐 위에 쏟아질" 것이 있다(27절). 그것은 바로" 혼미한 심령" (롬 11:28, 25)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이것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야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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