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진 않나요? 히브리어와 랍비들이 경고한 '교만'의 실체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진 않나요? 히브리어와 랍비들이 경고한 '교만'의 실체
혹시 오늘도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혹은 마음속 깊이 올라오는 섭섭함 속에 내가 주인이 되려는 욕심이 숨어 있지는 않았나요? 우리는 누구나 겸손하기를 원하지만, 아주 작은 성공이나 칭찬 앞에서도 금세 고개를 드는 내 안의 교만함 때문에 남몰래 괴로워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삶의 결정권은 내가 쥐고 싶어 하는 이 모순된 마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씨름일 것입니다. 이 글은 이러한 영적 고민을 안고 계신 분들, 특별히 설교를 준비하거나 묵상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 정리했습니다.
1. 성경 원어로 본 교만의 진짜 의미: '가아바'와 '휘페레파니아'
우리는 흔히 교만을 단순히 '잘난 척하는 마음'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 원어는 훨씬 역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구약 히브리어 '가아바(ga’avah)'는 바닷물이 솟구쳐 오르듯 자신의 분수를 넘어 부풀어 오르는 상태를, '자돈(zadon)'은 솥의 물이 끓어넘치듯 통제 불능의 욕망을 뜻합니다. 신약 헬라어 '휘페레파니아(hyperephania)'는 타인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의미하죠. 즉, 교만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높은 자리를 내가 차지하려는 치열한 '자리 싸움'이자 영역 침범입니다.
2. 교만의 기원: 천사 루시퍼와 에덴의 뱀은 무엇을 원했나?
도대체 이 지독한 교만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성경은 그 기원을 '피조물의 한계를 거부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이사야서에 묘사된 타락한 존재는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며 끊임없이 상승을 욕망합니다. 에덴동산의 뱀 또한 인간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라고 유혹했지요. 이것이 바로 원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 없이도 내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슬프고도 위험한 '독립 선언'인 것입니다.
3. 유대교 랍비들의 통찰: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
유대교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는 섬뜩한 경고가 있습니다. 랍비들은 "하나님과 교만한 자는 이 세상에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의 자아(Ego)가 방을 가득 채우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 공간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랍비 마이모니데스는 이 지독한 교만을 고치기 위해 '중용'이 아닌 '극단적 겸손'이 필요하다고 처방했습니다. 이미 휘어진 막대기를 펴려면 반대쪽으로 힘껏 꺾어야 하듯, 교만한 본성을 가진 우리는 예수님처럼 철저히 낮아지는 훈련을 통해서만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4. 심리학과 신학의 만남: 우리는 왜 불안할 때 교만해지는가?
우리는 왜 그토록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무시당하면 참지 못할까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와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그 원인을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과 '죽음 공포'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고 언젠가 잊혀질 존재라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돈, 명예, 성취로 자신만의 '불멸의 탑'을 쌓아 올리려 하죠. 겉보기에 당당해 보이는 교만은 사실, 내면의 깊은 두려움과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가장 처절한 방어기제일 뿐입니다.
5. C.S. 루이스와 팀 켈러의 처방: 자존감을 넘어 '자기 망각'으로
C.S. 루이스는 "교만은 그 본질이 경쟁이다"라고 꿰뚫어 보았습니다. 교만은 무언가를 가져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가질 때만 기쁨을 느끼는 지옥 같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팀 켈러 목사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아 망각(Self-forgetfulness)'을 제안합니다.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이미 존귀해진 나를 신뢰하기에, 더 이상 법정에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되는 이 자유야말로 진짜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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