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r

6/recent/ticker-posts

[시편 주석] 시편 10편 1절-11절, 포학자들의 사악함 - 주석과 해설 정리

시편 10편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않은 악인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들의 악한 언행을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공의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포학자들의 사악함에 대한 매튜헨리 주석을 정리하였습니다.


[시편 주석] 시편 10편 1절-11절, 포학자들의 사악함 - 주석과 해설 정리



시편 10편 1절-11절, 포학자들의 사악함 - 주석과 해설 정리


다윗은 이 구절들 속에서 다음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매우 사모하고 있다.


왜냐하면 환난의 때에 그가 가장 절실하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감추시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절). "어찌하여," 주의 이름에 행해진 모욕과 주의 백성들에게 가해진 재앙에 무관심한 자처럼, "멀리 서 계시니이까?" 하나님의 물러가심은 어느때나 그의 백성들에게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며 특히 환난의 때에는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외적인 구원이 멀어지고 우리로부터 감추어져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여 내적인위로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그것은 우리가 외적인 면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계신다고 원망하는 것이다.



그는 죄악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하고 있다.


그 죄악은 시대를 위험하게 만드는(딤후 3:1) 것이다. 그는 불의를 목격하고 근심하고 있으며, 또한 놀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평판을 그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헛된 영광 즉, "이 세리"와도 같이(눅 18:11)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분노나 언짢음이나 감정을 토로하기 위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과 모든 선한자들이 모욕당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그것이 시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이고 냉소적으로 악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유익하기보다는 해롭다. 우리가 그들의 사악함을 말하고자 한다면 기도로서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자. 왜냐하면 하나님께 서만이 그들을 더 낫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의 사악함에 대한 긴 묘사가 여기에서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2절)라고 하는 이 첫 번째 구절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들이 책망을 받게 되는 두 가지 사실은 교만과 핍박인데, 전자는 후자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만한 자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종교를 갖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게 하고, 그들의 지배에 굴복하고, 그들의 지시에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무색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굽히려 하지 않는 자들을 뿌리 깊은 증오를 품고 헐뜯으며 미워한다. 나라와 교회에서 횡포를 부리는 자들의 그 원인은 그들의 교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묘사하기 시작한 시편 기자는 곧 짧은 기도를 삽입적인 기도로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을 해치지 않고 이롭게 하고 있다. 교만한 백성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저희로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2절). 그들의 꾀를 거꾸러지게 하시고 그것에 의해 그들이 패망하게 하소서." 그들은 책망하는 이 두 가지 항목이 여기에 설명되어 있다.


1. 그들은 교만하며, 매우 교만하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해 극단적으로 자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곧 나타나시어 그들을 치시지 않는 것을 그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시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이다.

(1) 죄인은 자기의 능력과 성공을 교만스럽게 자랑한다. 그는"그의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음을 자랑하고(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제어하실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고 그 목표를 수행한 것을 자랑한다. 에브라임도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다"고 말했던 것이다(호 12:8). "주여 사악한 자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지옥을 사칭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주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까?

(2) 그는 우리가 진리에 따라 판단하신다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교만하게 반박한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께서 증오하시는 탐리하는 자들을 찬양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라. 하나님은 탐리하는 속인들을, 즉 돈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그것을 우상화하는 자들을 증오하신다. 그는 그들을 그의 대적으로 간주하신다. 그리고 그들과 교제하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과의 친교는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포학자들은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의 말을 칭찬한다(49:13).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선포하신 자들을(눅 12:20)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서 큰 죄를 지은 자로 정죄하신 자들을 무죄한 자라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생애에서 자기의 분깃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러한 자들을 행복한 자들로 존경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그러한 면에서 그들을 진실로 비참한 자라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네가 사는 날 동안 네게 좋은 것을 받으라."

(3) 그는 교만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신앙을 버린다(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즉 교만한 마음이 나타나는 얼굴로(잠 6:17).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생각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그의 사사예"아니 그들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즉 그의 모든 사상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1] 불경건과 불신앙의 본질. 그것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것이다. 거기에는 그를 찾는 일도 없으며(욥 35:10; 렘 2:6) 그를 향한 소망도 없고 그와의 교제도 없다. 단지 거기에는 그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은밀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악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즉 그에게 요청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없이 살아가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없는 삶이다. 그들은 많은 생각, 많은 계획과 방법 등을 갖고 있으나 그 어느 것에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그의 영광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2] 이러한 불경건과 불신앙의 원인, 그것은 교만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손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앙적인 사람들이 소수이며 비천하고 경멸당한다고 해서, 그리고 신앙의 규제가 그들에게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은 그들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 심판을 교만하게도 경시한다(5절).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나이다." 그는 사악한 길 속에서 매우 대담하고 단호하다. 그는 그의 길이 비록 그 자신에게 아무리 싫증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지라도 그것을 고수할 것이다. 그는 그의 사악한 진로 속에서 고통을 겪으나, 그의 오만은 그를 괴퍅스럽고 고집스럽게도 그것을 지속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심판(그가 명하시고 그 명령을 이행치 않을 때에 대한 그의 위협)은 "높아서 저의 안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의 의무를 깨닫지도 못한다. 그에게 그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를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여 부인할 것이다. 또한 "그는 하늘 높은 곳에"계시고 "우리는 우리 위에 있는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로써 그것을 묵살시킬 것이다. 그에게 범죄를 계속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해 보라. 그래도 그는 그 속에 어떤 실체가 있음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못하므로, 그는 그것을 단지 근거없는 것으로만 여긴다.

(5) 죄인은 교만하게 그의 모든 대적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지극히 업신 여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과 파멸을 주기 위해 예비해 두신 자들 앞에서 마치 그가 그것을 모두 좌절시킬 수 있고 그것으로 그에게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허풍을 친다. 그러나 적을 경멸하는 것이 졸렬한 일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를 경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6) 그는 교만하게 도전하며 그 자신의 계속적인 형통을 확신한다(6절). "저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그리고 그 생각으로 즐거워하기를"나는 요동치 아니하고"내 재품은 수 년 동안 쌓여 있으며"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즉 바벨론같이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하나이다(사 47:7; 계 18:7). 이처럼 파멸을 가장 멀리 여기는 자들은 거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이다.


2. 그들은 포학자, 잔인한 포학자들이다.

그들의 교만과 탐욕을 충족시키고 하나님과 믿음에 대적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손이 미치는 것을 매우 압제한다. 이러한 포학자들에 관해 살펴보자.

(1) 그들은 매우 가혹하며 사약하다(7절). "그 입에는 자주가 충만하나이다." 그들에게 실제적인 재앙을 행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는 양심을 품을 것이며, 그가 실행에 옮길 수는없을지라도 살기를 내뿜는 것이다.. 이처럼 충성된 하나님 예배자들은 종과 책과 촛불로서 파문당하고 저주받는다. 마음에 악의가 가득 차 있으면 일반적으로 그 입에도 저주가 가득 차 있다.

(2) 그들은 매우 거짓되고 믿을 수 없다. 그들이 계획한 재앙은 들키지 않도록 혀 밑에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 입에는 궤휼과 허탄함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귀에게서 속이는 것을 배웠고 또한 파괴하는 것도 배웠다. 그 궤휼로 그의 증오가 감추어지는 것이다(잠 26:26). 그는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을 하든지, 어떠한 맹세를 어기든지, 어떠한 위장 술을 사용하든지 개의치 않는다.

(3) 그들은 그들의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매우 교활하며 간교하다. 그들은 의도했던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방법과 수단을 갖고 있다. 교활한 사냥꾼인 에서처럼"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그 은밀한 곳에 앉으며, 그 눈은 재앙을 행하기 위해 엿본다."(8절). 그것은 그가 자기가 행한 것을 부끄러워하거나(그가 얼굴을 붉힌다면 아마도 그가 회개하리라는 약간의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11절). 그것은 그가 자기 계획이 발각되어 깨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정직한 여행자들과 그르이 갖고 있는 것을 탈취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도둑들과 노상강도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4) 그들은 매우 잔인하고 야안적이다. 그들의 악의는 결코 그들을 격노케 한 적이 없는 "무죄한 자," 그들에게 저항할 수도 없고, 또 그들을 이기는 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외로운(가난한) 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모두 정직과 영예를 완전히 빼앗긴다. 그들의 무죄함이나 궁핍함이 그 해로운 계획으로부터 그들을 안전케 해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을 가진 자는 무죄한 자를 보호해 주어야 하며 궁핍한 자를 도와 주어야 한다. 이처럼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목표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련한 자를 잡고, 그들을 자기 그물로 끌어들이는"것이다. 즉 그들을 자기수하에 끌어들여 그들을 알몸이 되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귀한 생명을 사냥한다. 그들이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련한 백성들로서, 그들이 하나님 하여금 것이고 또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해 무서운 증오를 품는다. 그러므로 포학자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엎드려 기다린다. 피에 굶주린 "사자가 엎드림같이 저가 엎드려 기다리고," 그 먹이로 만족하게 배를 불린다.

그를 다루고 있는 마귀는 포효하는 사자에 비교되어 있는데, 사자는 삼키기 위한 대상으로 동물을 찾으나 마귀는 사람을 찾는다.

(5) 그들은 비열하고 위선적이다(10절). 거리를 가늠하여 먹이를 잡으려하는 짐승처럼"저가 굽히고 엎드린다."이것은 비열한 마음을 가진 포학자들과 압제자들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천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몸을 굽힐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다윗을 탐색할 때의 사울의 수치스러운 행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사악한 계획을 감추기 위해 온유하고 겸손한 척하며, 그들이 크게 해하려는 자들에게 친절한 척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겸손한 척하여 가련한 자들을 탐지하고 살핀 후 그 계획대로 그들을 쓰러뜨려 자기들의 희생물로 만든다.

(6) 그들은 매우 불경건하며 무신론적이다(11절).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을 버리고 그 가장 거룩하고 자명한 원리의 빛에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이처럼 인간에 대한 모든 공의와 선함의 법도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저희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다 하나이다." 그 자신의 양심이 그의 사악함을 책망하고 그 결과에 대해 그를 위협하며, 의로우신 하늘과 땅의 재판장께 그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겔 8:12; 9:9)고 말하면서 그 답을 회피했다.

[1]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섭리에 대한 불경스러운 비방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아래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볼 수 없거나 보시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의 성품의 거룩함과 정직함에 대한 불겨스러운 비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인도에 어긋나고 비인간적인 악행들을 보셨을지라도 그것을 싫어하시지 않고 기꺼이 묵인해 주시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의 통치의 공의에 대한 불경스러운 비방이다. 그것은 마치 그가 악인의 사악함을 보시고 싫어하셨을지라도, 그가 할 수 없거나 감히 하려하지 않으시며 그렇게 하시기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결코 그것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그것에 대해 그들을 벌하시려고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압제자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자기들을 위해 나타나시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은 곧 전능자 하나님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를 향한 거룩한 분노


이 시편을 노래하고 그것을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압제자들의 사악함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하며, 압제당하고 있는 자들의 비참함에 대해 따뜻한 동정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합당한때에 해를 당한 자를 구하시고 그 해를 기억하시리라는 확고한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경건히 추구해야 한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