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인 동시에, 실제적으로는 로마의 통치 시대에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저작 시기에 대해 크게 네로 황제의 통치기인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요한계시록 서론
요한계시록의 저작 시기
1. 주후 1세기 말 혹은 주후 69년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저작 시기를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주후 95-96년)인 1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부의 학자들은 주후 68년 네로 황제가 죽은 직후와 70년 예루살렘 함락의 직전인 주후 69년이라는 날짜에 주목합니다.
주후 69년을 선호하는 일부의 학자들은 네로 통치 시대의 극심한 박해가 요한계시록에 기술된 상황과 더 부합된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주후 69년이라는 날짜가 특정한 구절들을 더 잘 읽을 수 있게 도와 준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11장 1절-2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방인들이 성전의 뜰을 짓밟은 사건(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 13장 18절의 짐승의 숫자(666이 네로를 암호로 지칭할 수가 있다는 점), 17장 10절-11절의 짐승의 머리가 일곱 개 등이 그것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후 1세기 말이라는 날짜가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집니다.
2. 외부적인 증거
외부적인 증거는 늦은 날짜를 더 지지합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네오(2세기 후반)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그것은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말기에 처음 우리 세대에게 주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이같은 전통을 따릅니다. 또한 11:1-2; 13:18; 17:10-11과 같은 특정한 본문은 도미티아누스 치세의 상황으로 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추가적으로, 일곱 교회들의 상황은 모두 성장기에 있으며, 니골라 당과 같은 거짓 교사들이 등장했으며, 일부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부패한 모습이 나타납니다(에베소, 사데 그리고 라오디게아 등). 또한, 일곱 교회들 속에 들어 있는 특정한 역사적인 언급들은 늦은 날짜에 더 어울립니다. 예를 들어, 3장 17절의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된 부분은 서기 60년의 대지진 이후의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아시아 지역에 정착하였고, 유대교 회당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한 반감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후기 연대'가 설명에 부합됩니다(2:9; 3:9).
- 요한계시록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3. 황제 숭배 강요에 따른 박해의 상황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황제를 숭배하는 것으로 인한 위협과 박해와 타협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의 강요는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제(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 즉 '우리의 주와 하나님'으로 불려지길 원했던 황제)의 통치 시절에 극에 달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통치 시기에도 박해는 극심했지만, 로마 지역에 한정이 되었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조직적이고 로마 제국 전역에 걸친 박해를 허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통치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종류의 박해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1:9; 2:2-3, 9, 13; 6:9-10; 16:6; 17:6; 18:24; 19:2; 20:4),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상황과 일치하는 가까운 미래에 박해가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2:10; 3:10; 6:11; 12:11; 13:7, 10, 15).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후계자로 여겨지게 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1세기 말에 점점 더 유명해진 '네로 레디비부스 전설'(Nero redivivus), 즉 네로가 부활하여 로마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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