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였기에, 소외되었고 외로웠으며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엄청난 것들을 주었습니다.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성전 미문과 걷지 못하는 자
지금도 예루살렘의 성벽에 가면, '미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문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ὡραῖος, 호라이오스) 문'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문헌에는 이 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늘날의 위치를 볼 때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향해 있는 '분문'(Dung gate)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에 위치한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쪽에 위치한 문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문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과 음식을 구걸하기 위하여 한 사람이 이 곳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라고 본문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위하여 "의"(צדקה, 쯔다카)를 행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의"라고 생각하였기에, 구걸하는 이들에게 동전을 나누어 주는 경우들이 많았고 이 사람은 그 이유로 미문에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주는 음식과 돈은 그가 한 끼를 연명하거나 하루를 먹고 살 수 있도록 돕는 정도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에 성전을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비록 그에게 음식과 돈을 주진 않았으나, 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우리는 은과 금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들을 얻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일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은과 금은 근본적인 우리의 문제인 '구원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이 남자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준 것
본문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이 남자에게 준 것이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미문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거나 나오던 사람들은 구걸하는 이 사람을 보고서 음식이나 돈을 줄 생각만 했지, 이 사람에게 관심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 사도행전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보라"(βλέπω, 블레포)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음식과 돈보다 갈망하는 이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평생 앉아 지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몸에 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가 있다는 생각이 많았기에, 스스로 큰 죄인이라는 자책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그의 눈을 맞대고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허하고 쓸쓸하며 허무함만이 가득한 사람, 날 때부터 걷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홀로 한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눈과 눈을 맞대며 "관심"을 주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타인에게 관심을 주고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외로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 사이에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가족끼리 모여서 함께 식사하고 떠들고 웃으면서도 마음 한 켠은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물며 평생 남과의 깊은 관계, 애정어린 관계를 느끼지 못했을 이 남자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라고 말하며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관심을 주었습니다. 눈과 눈을 마주하는 것은, 1시간 동안의 사랑 고백보다 더 많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보고 위로를 받읍시다. 그리고 위로 받은 내가 또 다른 외로운 이를 찾아가 관심을 주고 위로를 줍시다. 나와 그 사람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며 구걸하는 외로운 이 남자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눈과 눈을 마주하며 관심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과 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분명히 '내게 있는 이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질 급하고 예수님을 쉽게 배반했던 실패한 베드로의 마음과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갈릴리의 풍랑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믿음 없던 그를 능력의 사람으로 바꾼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가 되게 했고 교회의 기둥이 되게 했으며 능력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하고 자신이 소유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이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돈과 음식보다 더 큰 문제, 평생토록 안고 지내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문제인 걷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은과 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건강의 회복을 얻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고, 이 사람이 베드로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으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아서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또 나눠 주다보면 내 것까지 모자라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풍성하고 부족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나눠 주면 줄수록 내 삶도 풍성해지며 받는 사람의 인생도 풍성해지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주를 위하여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의 능력을 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꿈이 사라지고 몸과 영혼이 피곤하며 슬픈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 위로를 받고 주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붙잡고 일어나 걸어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눈을 맞추어 관심을 주고, 능력의 이름인 예수의 이름을 걷지 못한 자에게 준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과 함께 하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지금껏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 받음으로써 그 어떤 공동체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였던 이 남자와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 사도행전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일어나 걷게 된 이 남자는 너무나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서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쁨에 가득 찬 이 남자의 최초의 친구가 되어 함께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되어 주었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동료가 되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깐부"라는 말도 덩달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깐부라는 말은 '동료', '친구'라는 의미인데, 어떤 이들은 밴드나 단체를 뜻하는 영어인 'combo'(캄보)에서 온 말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 간의 깊은 우정을 뜻하는 사자성어인 '관포지교'의 '관포'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하는 친구나 동료를 뜻하는 말인 깐부에 대해, 드라마 중에 나오는 등장 인물이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거야'라고 말합니다. 즉,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모든 물건을 가져와서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에, 일종의 깐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막 걷게 된 이 사람의 깐부가 되어 주었고 함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챙기고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는 일은 어려워 합니다. 당연합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일시적인 나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챙기고 함께 하는데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24시간 함께 하셨듯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항상 교통하며 함께 해 주기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내가 먼저 함께 하며 베풀 때, 더 많은 은혜가 나에게 되돌아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들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 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에서 만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들은 눈을 바라보며 관심을 주었고,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함께 들어가 하나님께 같이 예배하는 친구요 동료가 되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눈을 마주 보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가족이나 이웃 중에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또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함께 하는 마음을 누구에게 나누고 있습니까? 누구의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었던 관심과 예수의 이름과 사랑의 교제함을 우리도 긴급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참고할 자료
- 사도행전 2장 37절-47절, 예루살렘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 묵상과설교 새벽설교
- 말라기 3장 7절-12절, 순종을 통한 축복 - 묵상과설교 말씀묵상과 새벽설교
- 출애굽기 27장의 '대야'와 출애굽기 30장의 '물두멍'의 차이 - 성경사전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