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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관한 질문과 대답 26.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의 작은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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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은 각각 일을 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가인은 곡식을, 아벨은 양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반응에는,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 보였던 작은 차이점 때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의 작은 차이점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 펼쳐지는 형제 간의 갈등,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각각 농사꾼과 목동으로, 생업에 따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 제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차이만이 아니라 두 형제의 마음과 신앙까지 드러내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질 너머의 가치, 진심의 표현 가인은 땅의 열매를 바쳤습니다. 곡물, 과일, 채소 등 그의 노력의 결과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다릅니다. 그는 양떼 중 맏것,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동물을 선택했습니다. 맏것은 번식의 핵심이었으며, 가축 재산의 미래를 좌우하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 이상으로, 하나님을 향한 아벨의 헌신과 진심을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면서 깊은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과 속의 차이, 거룩한 선택의 배경 흥미롭게도 성경은 가인의 제물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의무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바쳤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은 '기름'(חֶלֶב, ㅋ헬레브)이라는 단어로 강조됩니다. 그는 단순히 양을 바친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부분, 하나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하실 부분을 드렸습니다. 이는 그의 제물이 겉치레한 행위가 아닌,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앙의 표현임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핵심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세 명의 아들들 외에 자녀들이 더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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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그를 돌로 죽인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는 세 번째 아들인 셋이 태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인이 방황하게 될 것이라 심판하신 하나님께 "나를 만나는 자마다"(창 4:14)라고 말한 가인의 말이 의미하는 내용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세 명의 아들들 외에 자녀들이 더 있었는가 1.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에서는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에게 세 번째 아들인 "셋"이 태어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러한 기록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녀 세 명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게 또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וַיִּֽהְי֣וּ יְמֵי־אָדָ֗ם אַֽחֲרֵי֙ הֹולִידֹ֣ו אֶת־שֵׁ֔ת שְׁמֹנֶ֥ה מֵאֹ֖ת שָׁנָ֑ה וַיֹּ֥ולֶד בָּנִ֖ים וּבָנֹֽות ׃ 붉은 색의 " וַיֹּ֥ולֶד בָּנִ֖ים וּבָנֹֽות "(봐욜레드 바님 우바놋)의 히브리어 문구는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에게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자녀들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러한 모습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의 이러한 말씀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나를 만나는 자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 했던 말입니다. 창세기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אלוהים이 복수형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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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나님"은 단수형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인 "אלוהים"(엘로힘)은 복수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 신(神)들의 집합체인 것일까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אלוהים이 복수형인 이유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신들의 집합체이거나 여러 인격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 한 분 "이시며 " 유일하신 분 "이십니다. 그 증거는 창조를 의미하는 동사인 "בר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신 이유 히브리어는 명사가 단수냐 복수냐에 따라 동사의 형태가 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인 "אלוהים"이 복수라면, "창조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인 "ברא" 역시 3인칭 복수형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ברא의 3인칭 복수형은 "בראו"(바르우)입니다. 그러므로 אלוהים이 복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בראשית בראו אלוהים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동사인 "ברא"는 3인칭 남성 단수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אלוהים은 남성 단수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אלוהים이 복수 형태인 이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אלוהים이라는 복수형태로 쓰이는 것일까요?  1. 히브리어 אלוהים의 원 뜻 일반적으로 이 의문에 대하여, אלוהים은 단순히 "신(神)" 혹은 "하나님"을 뜻하는 ...

다니엘 8장 9절에 기록된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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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이 본 환상의 내용들을 볼 때, 여러 면에서 낯설거나 복잡해 보입니다. 특히 다니엘 8장 9절에 기록된 뿔과 또 다른 작은 뿔에 관한 환상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여러 해석들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다니엘 8장 9절에 기록된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에 대한 해석 작은 뿔이 네 바람 중에서 나왔다는 증거 1. 8절과의 연결 다니엘 8:8의 “하늘의 네바람”(“하늘 사방”)이 9절의 “그 중 하나”(히브리어 본문에는 개역개정판이 삽입한 “뿔”이 없음)의 가장 근접한 선행사이며, 따라서 이는 작은 뿔이 네 주요 방향을 가리키는 은유(렘 49:36, 슥 2:6)인 하늘의 네바람(사방)에서 나왔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새국제역(NIV)은 “그들 중 하나에서”(Out of one of them) 나왔다고 번역하였다. 원어에서 “그들 또는 그것들(them)”은 남성 명사인데, “뿔”은 여성 명사이다. 그러나 “사방”(원어는 “네 바람”)은 남성, 여성 모두 가능한 명사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의 하나”는 “뿔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네 방향” 중의 한 방향인 것이 분명하다. 로마는 알렉산더의 제국이 넷으로 쪼개져 나간 네 방향 가운데 하나인 서쪽에서 출현하여 “남쪽과 동쪽과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이 커졌다. 2. 구조적 배열 다니엘 8장의 이상에 관한 묘사를 구조적으로 배열해 보면, 작은 뿔은 이전 두 짐승과 대등한 수준에 속해 있다. 이상은 세 주요 부분으로 되어 있다: 숫양(3-4절), 숫염소(5-8절), 작은 뿔(9-11절)에 관한 묘사. 각 부분은 동일한 패턴 곧 소개와 활동을 보여 주며, 절대적인 권력과 자만 그리고 쇠망이 차례로 뒤따른다. 시작되는 각각의 진술에서 주역(숫양, 숫염소, 작은 뿔)은 지리적인 위치와 관련하여 소개되며, 첫 행동은 각각 지리적 방향과 관련된 운동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패턴에 비추어 볼 때, “그중 하나”는 하늘의 네바람 중 하나를 가리켜야 한다. 3. 다니엘 환상과 연결...

시편 1편 2절, "묵상하다"(הָגָה, 하가)의 히브리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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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의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으로는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묵상하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הגה"(하가)인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편 2절에 기록된 "묵상하다"의 히브리어 원어 의미를 정리하였습니다. 시편 1편 2절, "묵상하다"(הָגָה, 하가)의 히브리어 의미 시편 1편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하다"(הגה)의 의미 הגה는 기본어근이며, '신음하다, 슬퍼하다, 으르렁거리다, 말하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묵상하다, 숙고하다'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5회 나오며, 사 8:18(히필형)을 제외하고는 칼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הגה는 비둘기의 우는 소리(사 38:14, 사 59:11)나 먹이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소리(사 31:4)와 같은 '낮은 소리'를 뜻합니다. 1. 중얼거리다 הגה는 때때로 모압의 심판에 관한 애곡(사 16:7, 렘 48:31)을 묘사합니다. 마술사들은 마술을 행할 때 속삭거리거나 중얼거린다고 합니다. 이사야 8: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 울부짖다 시편 기자는 절망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호소하고 울부짖습니다. 이 때 사용된 단어가 הגה입니다. 시편 5편 1절에서는 명사인 "הגיג"(하기그)로 표현되었습니다. 시편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3. 악한 자가 거짓을 말하다 הגה는 종종 악한 자가 마음에 품거나 악한 나라가 꾀하는 간계를 언급하는데, 이는 거짓말이나 속이는 말로 나타납니다. 악한 자의 말은 마음에서(사 59:13) 그리...

히브리어와 헬라어 "예배"의 개요와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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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경배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행위는 우상숭배의 행위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는 "예배"를 어떻게 표현할까요? 원어와 그 의미를 간략히 정리하였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예배"의 개요와 본질 예배의 개요 예배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들의 마음 가짐과 행동 그리고 그 모든 양식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인 예배와 관련된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 1. "עבד"(아바드), 섬기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를 가진 단어인 "עבד"는 "봉사하다" 또는 "섬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흔히 "service"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모든 행위를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שחה"(샤하), 엎드리다 히브리어 "שחה"의 원래의 뜻은 "굴복하다" 혹은 "자신을 바닥에 엎드리다"입니다.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순종과 봉사의 종교적인 의미를 표현하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으로 최대한의 존경을 나타냅니다. 시편 44: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 1. " προσκυνέω "(프로스퀴네오), 입을 맞추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존경의 의미를 담아 엎드려 절하거나 혹은 충성을 맹세하며 입을 맞추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배의 본질 그러므...

바벨론 제국의 학문,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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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성장하여 대제국을 이룬 바벨론은, 당대에 이집트와 겨룰 정도의 학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점성술 등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바벨론 제국 즉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학문,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에 대하여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 1. 갈대아 사람의 복잡한 언어 체계 다니엘 1장 4절에 나타난 이 용어는, 당시 최고의 천문학자들이었던 바벨론 궁전의 어떤 학자들 계층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학자들은 마술과 점성학을 그들의 활동 영역에 포함시켰지만, 또한 수학과 같은 다른 과학에도 정통하였습니다. 많은 현대 주석자들은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라는 말은 갈대아인들의 과학과 어학이 결합된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 당시의 모든 과학 저술은 점토판에 바벨론어 설형문자로 새겨졌으므로 구어체의 아람어와 더불어 그 나라의 고전적 언어와 필기체 문자, 곧 바벨론어와 설형문자 쓰기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포함했을 것입니다. 수백 개의 문자로 된 설형문자에 숙달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좋은 교육 배경과 선천적 학습 능력,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익히는 재능은 왕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선행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뛰어난 능력과 구원의 상관 관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똑같이 헌신하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태어난 것과는 상관 없습니다. 구원은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값어치는 동일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받는 구원은 백만원 짜리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받는 구원은 10원짜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마 20장에 나오는 품꾼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새벽,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일꾼을 포도밭에 ...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을 하나님께 헌금과 예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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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릴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부정반 방법으로 돈을 벌었지만, 하나님을 위해 쓴다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을 하나님께 헌금과 예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 우리말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 좋은데 쓴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참 의미는 "힘들고 어렵게 돈을 벌었지만 그것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뜻합니다. 예전에 신문에서, 어렵게 과일을 팔아 평생동안 모은 수백억의 재산을 학교 재단에 다 기부한 노부부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존경스러운 이 노부부의 삶이 바로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삶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부정하게 번 돈, 흠이 있는 제물 조금 결이 다르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예물에 대한 규정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실하고 진실하게 번 돈과 깨끗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 음란하고 사악하게 번 돈 먼저 음란하고 사악한게 번 돈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음란하게 벌거나 사악하게 번 돈을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죄악 가운데 번 돈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신명기 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고생하여 번 돈이 아닌, 음란한 일들로 번 돈은 하나님께서 "가증"(תּוֹעֵבַה, 토에바)하게 여...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의 뜻,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아마겟돈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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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마겟돈'이라는 말이 일종의 자연 재앙이나 극복할 수 없는 파괴적한 사건을 일컫는데 사용합니다. 인류 전체의 멸망까지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에 사용하되곤 하는 '아마겟돈'의 히브리어 및 헬라어 어원과 그 본래의 의미 등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의 뜻,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아마겟돈의 결과 아마겟돈의 출처 요한계시록 16장 12절부터 16절에는,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아마겟돈'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 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2-16)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 11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의 군대를 물리치실 때 최후의 전쟁이 벌어진다고 언급합니다. 이 최후의 전쟁이 바로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마겟돈과 므깃도 산 1.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은? 그렇다면, 아마겟돈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무시무시한 최후의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아마겟돈"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 Ἁρμαγεδών "(아르마게돈)이며, 이 말은 히브리어 "הר מגידו"(하르 메깃도)에서 왔습니다. 영어로는 "Armageddon"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라는 명칭은 히브리...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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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곳곳에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합니다. 종말에 심취하여 각종 이단과 사이비들도 생겨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이 종말을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우리의 자세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 베드로 후서 3장 10절에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종말의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불에 완전히 풀어지고 파괴될 것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숨김이 없이 드러나게 된다고 베드로는 설명합니다. 흔히 "주님의 날"이라는 이 날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 한 가운데 임재하시고 개입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천지를 파괴하시는 날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일들 많은 신학자들은 세상의 종말의 날을 "밀레니엄"이라고 부르는 천년 왕국의 끝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천년 왕국을 통치하시고, 천년 왕국의 마지막에 사탄이 일시적으로 풀려나서 불과 유황의 연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이후에 베드로 3장에서 말하는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게 됩니다. 1.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변화 베드로는 세상의 종말이 되며 모든 것이 떠나가고 불타고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원소들은 강력한 열과 불꽃에 의해 녹을 것이며, 그 모든 현상들은 밝히 드러나며 모두가 보고 듣게 될 것입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모든 것이 불타고 변화된 이후,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 1장 15절에 나타난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두 가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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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고 있는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아들이 바로 세례 요한인데, 천사는 세례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모태에서부터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말한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두 가지 설명입니다. 누가복음 1장 15절에 나타난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두 가지 설명 누가복음 1장 15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두 가지 설명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충만’에 대한 그리스어 동사는 ‘핌플레미(가득하게 하다)’이지만 성령과 관련된 형용사 ‘플레레스’(충만한)’도 있다. 그 동사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눅 5:7, 1:23). 그러나 그 동사의 비유적 용례를 살펴 보고자 한다. 1. 감정의 충만 인간은 감정의 존재이고 감정은 불시에 닥쳐온다. 예수의 말씀을 경청한 후에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했고(눅 4:28 “분[두모스]이 가득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한 사람을 치유하셨고 유대 지도자들은 화를 냈다(눅 6:11 “분기[아노이아]가 가득하여”).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제자들이 하는 일을 보고 적개심과 시기(indignation[젤로스])가 가득하여(행 5:17) 그들을 체포했다. 에베소에서 폭도들은 분노했고 온 도시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행 19:29 “요란하여”). 어떤 때에 사람들은 선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모든 사람이 놀라”(눅 5:26 경외감[포보스]) 버렸다. 베드로는 앉은뱅이 걸인을 치유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려움(“기이히 여기며”[담보이아])과 충격(“놀라니라”[엑스타시스])에 빠졌다(행 3:10). 사람들이 감정에 충만할 때 그 감정이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특별한 행동으로 이끈다는 것을 이런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힘은 외부에서 오며 ...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에 여인들이 기록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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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여인이나 아이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유대 사회 속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들의 명단을 기록하였습니다. 기록된 4명의 여인들도 이방인이거나 도적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직업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정리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에 여인들이 기록된 이유 마태복음에는 4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여인들이 아니다. 마태가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에 족보를 기록한 목적 1. 구속사적인 의미 유대인들은 개인이나 가문 혹은 어떤 집단의 혈통 또는 기원을 밝히려고 족보를 기록했다. 그래서 족보를 통해 개인의 상속권의 합법성을 밝히고 사회적인 지위나 권리 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족보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족보가 구속사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족보가 나온 이유는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활동이 어떻게 중단 없이 계속되어 왔는가를 족보의 기록을 통해 확인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2. 노아의 족보와 구속사적 의미 창 10장에 나온 노아의 족보는 홍수 후에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노아의 후손들을 통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 1장과 눅 3장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목적 때문에 성경의 족보는 어떤 인물은 생략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 주는 인물이면 때로는 이방 여인도 포함하고 있다. 유대인의 족보 유대인의 족보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정실 부인의 자식을 족보에 기록했다.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나타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써 중요한 목적이나 의미가 있을 때에 한했다. 특히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가 4명의 여인들을 족보에 포함시킨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 중 최소한 두 여인(라합, 룻)은 혈통적으로 이방인이었다(밧...

예수님의 제자인 바돌로매의 조각상은 그의 끔찍한 순교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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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 정보가 가장 부족한 제자는 바돌로매입니다.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가 단지 열 두 제자의 명단에만 한 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 로 여겨지며, 끔찍한 순교를 했다고 알려집니다. 그의 조각상이 그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바돌로매의 조각상과 바돌로매의 순교 형상을 만들지 말라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조각상을 만드는 행위는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진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기독교 내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형상들은 신격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독교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형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상은 이해도를 높인다 구약성경에서 성전을 건축하는 내용을 보면, 성전 장식에서 천사나 황소 등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형상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전을 건축하면서 만든 장식의 일부일 뿐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상 1. 순교자들의 조각상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도들이나 순교자들에 대한 그림이나 동상들이 많이 그려지고 만들어졌었습니다. 그림이나 동상들을 사실적으로 만들면서 성경의 내용을 시각화하거나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마르코 드아그라테'의 '사도 바돌로매의 가죽'입니다. 2. 마르코 드아그라테의 '사도 바돌로매의 가죽' 마르코 드아그라테는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조각가입니다. 그는 조각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주로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조각한 '사도 바돌로매의 가죽'이라는 조각상은 밀라노 두오모에 있는데, 위의 사진과 같은 모습의 조각상입니다. 그의 작품은 너무나...

[성경 난제] 성경에 기록된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은 같은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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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나옵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성경학자들은 고민하였으며, 어떤 학자들은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은 같은 사람일까요?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나타난 복음서들 많은 성경 학자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나다나엘이, 사도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기록된 바돌로매는 열 두 제자들의 명단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기록된 내용이 없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단순히 명단에만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나다나엘'이라는 이름만이 등장할 뿐입니다.  바돌로매는 이름이 아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의 뜻은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돌로매'라는 말은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집안을 나타내는 사람의 '성'(性)씨임을 암시해 줍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혹은 빌립과 나다나엘 공관복음에 나타난 바돌로매는 항상 사도 빌립 과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빌립과 함께 짝을 이루어 언급되는 인물이 나다나엘입니다.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의 관계 바돌로매와 빌립이 연결되고 나다나엘과 빌립이 연결되는 복음서의 기록을 토대로,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은 동일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을 한 줄 덧붙인다면, 성은 '바돌로매'이고 이름이 '나다나엘'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할 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요나의 아들 안드레에 대한 이야기 예수님의 열...

[성경난제] 진리를 떠난 자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 5장 19절과 히브리서 6장 4절의 모순점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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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내용을 묵상하고 읽다보면, 서로 모순이 되는 것같은 구절들이 보입니다.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에서는, '진리를 떠난 자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6절은 '돌아오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성경난제] 진리를 떠난 자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들어가며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은, 배교한 자라도 다시 돌아오게 하여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배교한 자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표면적인 글만을 본다면, 명백히 모순되는 말들입니다.  두 구절의 내용들 1.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의 내용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이 구절의 의미는 복음에서 떠난 자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견해를 담고 있습니다. 한 번 배교하고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야고보 사도는, 배교한 자를 다시 진리로 이끈 사람은 그 영혼을 구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말은 한 번 복음의 진리를 떠나 배교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열여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 하지만,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성경난제] 우리의 믿음(에베소서 2:8-9)과 귀신의 믿음(야고보서 2:19)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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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 귀신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귀신도 믿으니 구원을 얻는 것일까요? 두 구절에 대하여 비교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귀신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들어가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 역시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9절을 통하여 귀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매우 곤란하고도 모순적인 의문점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요한과 바울의 말을 기초로 한다면, 귀신 역시 믿으니 구원을 얻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같은 모순점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관련 구절 1. 에베소서 2장 8절-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관련 구절에 대한 해설 1.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 관한 해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으며 구원은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인 이유는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 야고보서 2장 19절에 관한 해설 야고보서 2장은 참된 믿음은 올바른 행함을 낳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바른 믿음을 가졌다면 선한 행동 역시 필수적으로 따라와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21절부터 24절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

[성경난제]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예수님이 "참"(ἡ ἀληθινή) 포도나무라고 하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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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참" 포도나무이시며 하나님은 농부이시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신 것은 알겠는데, 굳이 "참"( ἡ ἀληθινή,  헤 알레디네)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이십니까?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개역개정 성경) 그리고 이 말씀이 헬라어 성경(Nestle, 190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καὶ ὁ Πατήρ μου ὁ γεωργός ἐστιν.   (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헤 알레디네, 카이 호 파테르 모위 호 게오르고스 에스틴)  우리말로 "참"이라고 번역된 ' ἡ ἀληθινή'(호 알레디네)는 '진실한', '진짜인' 그리고 '진품의'라는 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진실한' 혹은 '진짜'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짜 포도나무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순히'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진짜' 포도나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진짜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가짜 포도나무도 있다는 말일까요?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 혹은 "포도원"과 연결하는 구절들이 나타납니다. 아가서 7장 8절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포도송이'(아 7:8)로 혹은 '포도주'(아 7:2)로 비유했으며,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원"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이사야 3: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성경난제] 요한복음과 영지주의(γνωστικός, Gnosticism)의 차이점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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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이단이었는데, 이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비주의적인 환영과 깨달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영지주의와 요한복음의 대표적인 차이점 세 가지를 정리하였습니다. 요한복음과 영지주의( γνωστικός , Gnosticism)의 차이점 세 가지 주후 140년 경에 최초로 출간된 도마복음서와 요한복음은 같은 인대의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쾨스터는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속에 나타나는 독특한 개념인 "빛과 어두움, 선택된 자와 불신자, 하늘에 속한 자와 이 세상에 속한 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존재론적인 이원론과도 매우 유사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영지주의와 요한복음과의 관계에 대해 경쟁관계이자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과 영지주의의 차이점 하지만, 도마복음서나 빌립의 복음서, 진리의 복음서와 같은 영지주의 문서들에는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을 빌려 와서 기록했지만, 요한복음과 분명한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1. 인간에 대한 이해의 차이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는 절대로 가까이할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알게 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였고, 인간의 자아와 창조주는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차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일한 구원자라고 강조합니다. 죄와 회개에 대해 선언하며 자신이 곧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심을 선언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지주의 문서들에 등장하는 예수는 죄와 회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단지 영적인 지식에 접근해 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길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영적 지식에 도달하고...

[성경난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성경구절 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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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든지 대표로 기도할 때든지, 항상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지 않고서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성경구절 예수님의 이름이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모든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고, 이 선언은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하는 근거가 되는 말씀들입니다. 1.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2.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구할 때 무엇이든지 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고 주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도를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중보적 사역을 표현하며 예수님만이 가지시는 권위를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중보자이시며 권위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주께서 능력으로 행해 주십니다. 3. 요한복음 16장 24절 지...

[성경난제] 나병환자가 병이 있는 동안에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이유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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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질병이 있는 것만큼 고달픈 일이 없는데, 레위기 13장 46절에서는 나병환자를 완전히 격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이처럼 매몰차게 진영 밖으로 격리하게 하시고 혼자 살도록 명령하신 세 가지 이유를 정리하였습니다. 나병환자가 병이 있는 동안에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이유 레위기 13장 46절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개역개정 성경) 그 사람은 병에 걸려 있는 동안 부정한 상태에 있다.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 (쉬운 성경) 진영 밖에 나가 살아야만 하는 나병 환자 하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피부 감염병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주셨습니다. 레위기 13장에 나타난 질병들은 전반적인 피부 감염병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감염병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46절에 언급된 "나병"이었습니다. "나병"은 히브리어로 "צָרַעַת"(짜라아트) 인데, 좁은 의미로는 '나병'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질환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피부질환' 을 의미합니다. 나병환자가 격리되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이같은 나병을 비롯한 피부질환 환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고 규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타인에게 병원균을 옮기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나병을 비롯한 피부 감염병에 대한 격리 규정들을 주신 이유는, 피부병 환자가 다른 이들에게 병원균을 옮기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나병 및 피부병 환자는 스스로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접촉하지 않도록 자신의 나병에 대해 큰 소리로 알려야만 했습니다. 이같은 격리 정책은, 당시에는 공공 방역 시스템이나 오늘날과 같은 의학 체계가 미비했기 때문입니다. 2. 의복과 집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본문은, 사회적으로 ...